■ 외주사 살 길은 '시간 전쟁'… 배우들 다쳐도 촬영 강행
한예슬 사태는 한국 드라마 제작 현실의 문제들을 집약시켜놓은 축소판이다. 지난해 KBS 극본공모 당선작 '스파이 명월'은 독특한 소재로 여러 PD들이 탐을 냈으나 마땅한 주연배우를 구하지 못해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러던 차에 외주제작사 이김프로덕션이 한예슬 카드를 들고 나왔다. KBS는 '쩐의 전쟁' 출연료 문제로 박신양과 송사까지 벌인 이김 측이 못미더웠으나 그 이상의 배우 캐스팅이 어렵다고 판단해 손을 잡았다. KBS 관계자는 "한예슬이 드라마 한두 편 찍은 것도 아니고 사정을 모를 리 없는데 왜 갑자기 주5일 촬영을 주장했겠느냐. 외주사가 섭외 때 약속했다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방송 편성을 따내기 위해 A급 스타 섭외에 사활을 건 외주사가 현실을 무시한 약속을 해 이번 사태를 불렀다는 것이다. 외주사가 인기 작가에게 고액을 제시하고 아예 전속계약을 하는 경우도 많다. 결국 톱스타나 작가의 몸값은 더 올라가고 이는 제작비 상승으로 이어진다.
불평등 계약 속 외주사는 제작비 절감에 매달려
미니시리즈의 편당 제작비는 2억~2억5,000만원 정도. 하지만 외주사들이 방송사에서 받는 제작비는 40~6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외주사에는 아직 금지된 간접광고(PPL)를 활용한 협찬 등을 통해 '알아서' 보충한다.
저작권 등에 관한 불평등 계약도 문제다. 방송사는 국내외 방송, 판매용 비디오,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타이틀명과 캐릭터 및 심벌 일체의 권리를 갖는 '갑'으로 군림한다. '을'인 외주사 몫은 OST 음반 제작과 판매권 정도. 제작사 관계자는 "이런 구조에서 돈을 벌 수 있겠나. 한국 드라마에 OST가 지나치게 많이 삽입되는 건 다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외주사들은 제작비 절감에 매달리게 된다. 제작 현장에선 모든 부분에서 '시간이 곧 돈'이니 촬영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수밖에 없다. 회당 출연료를 받는 배우들과 달리, 스태프 임금이나 촬영장비 대여는 일비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대본 받아보고, 배우 사고 땐 결방
드라마 제작 현장은 늘 촉박하게 돌아간다. 한 방송사 PD는 "오전 7시부터 밤 12시까지 촬영하면 40분짜리 테이프 4개를 채운다. 이걸 편집하면 드라마 10분 분량이 나온다. 70분짜리 한 편을 만들려면 일주일 꼬박 촬영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실제론 두 편을 만들어야 하니 생방송 하듯 찍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요즘엔 '스마트폰 드라마'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했다. 대본이 하도 촉박하게 나와 프린트해서 뿌릴 시간조차 없기 때문에 아예 배우들이 휴대폰으로 대본을 받아 그 자리에서 외워서 촬영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분초를 다투는 촬영 현장은 크고 작은 사고를 동반한다. 최근 유승호, 홍수현 등 배우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이들은 빠듯한 일정 탓에 간단한 치료만 받고 곧바로 촬영 현장으로 달려갔다. 최근 종영한 MBC '넌 내게 반했어'는 주인공 박신혜가 차량이 반파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어쩔 수 없이 한 회 결방하기도 했다. 돌발 사고가 생기면 곧바로 방송 차질로 이어지는 구조지만, 방송사나 제작사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늑장 편성, 시청자 눈치보기 언제까지…
외국 방송사에선 드라마 편성이 1,2년 전에 결정되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국내에선 편성 자체가 늦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수시로 바뀐다. 방송사들은 워낙 트렌드도, 선호 배우도 빨리 바뀌는 현실에서 시청자와 타 방송사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방송 관계자는 "'최고의 사랑'의 홍정은ㆍ미란 자매 작가처럼 중간중간 시청자들 반응을 보고 수정하려고 일부러 대본을 미리 쓰지 않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렇게 제작되는 적잖은 드라마들이 높은 시청률을 올리는 반면, '로드 넘버원' '파라다이스 목장' 등 사전제작 드라마가 줄줄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생방송 드라마'가 필요악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배우들의 교통사고에서 제작진-배우 간 갈등까지 최근 들어 부쩍 잦아지고 있는 각종 위험요소를 방치한 채 드라마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까. 방송사와 제작사가 해법찾기에 나서야 할 때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 "일주일에 40분짜리 5편 완성해야"… 쪽대본 양산 악순환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빠지지 않는 단어가 '쪽대본'이다. 말쑥하게 제본까지 된 대본이 배우와 스태프에게 전달되는 경우가 가뭄에 콩 나듯 하는 게 요즘 여의도의 현실이다.
쪽대본은 현장에서의 갈등뿐 아니라 여러 부작용을 만들어낸다. 드라마의 전반적인 질 저하는 당연하고, 완성된 대본이 없으니 해외 수출 사전 계약이나 합작도 꿈꾸기 힘들다. 제작사들은 "작가들이 대본을 빨리 주면 여러모로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게으른' 작가들만 비난의 돌을 맞아야 할까.
'쪽대본'은 영세한 환경에서 빨리, 많은 내용을 찍어내야 하는 한국 드라마의 총체적 부실을 상징한다. 시간은 한정돼 있는데 정해진 물량을 쏟아내야 하니 작가들은 '글감옥'에서 쪽대본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을 지낸 박정란 작가는 "일일 드라마의 경우 일주일에 40분짜리 5편 분량을 써야 하는데 인간으로선 한계 상황을 넘는 양이다. 방에 틀어 박혀 하루 5시간밖에 못 자며 쫓기듯 글을 써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가와 PD의 지나친 소모전도 생산성을 낮춘다. 보통 미니시리즈는 편성에서 방송까지 4,5개월 가량 걸린다. 방송 시작 때까지 적지 않은 분량의 촬영이 가능한데도 보통 3회분까지만 촬영이 이뤄진다. 작가와 PD가 신경전을 벌이며 시놉시스와 초기 대본을 수정하는데 지나치게 힘을 빼기 때문이다. 한 드라마 작가는 "초기 수정에 시간을 많이 들이니 4회 정도부터 쪽대본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물론 PD와의 신경전 때문에 대본을 쓰고도 늦게 주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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