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교육인증 탓에 한 학기를 더 다니고서야 졸업했어요. 포기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가 공학교육인증 전공과목을 다 이수하지 못 한 거예요. 제 잘못도 있지만 어찌나 막막하던지."(서울 소재 공대 졸업생 김모씨)
"실험 기자재가 없어 설계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대학도 많아요. 한국공학교육인증원에선 이런 현실은 간과한 채 자꾸 설계수업만 강조하니 하는 수 없이 이론수업으로 대체하는 등 편법으로 운영하는 곳도 있습니다."(서울 소재 공대 교수)
융통성 없는 커리큘럼
공과대학 교육을 선진화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공학교육인증제(이하 공학인증)가 정작 수요자인 학생과 교수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서울 소재 한 사립대학 교수는 "도입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공학교육인증제는 여전히 자리를 못 잡고 있다"며 "공대 학생과 교수들 모두 좋아하지 않는데, 도대체 누굴 위한 인증이냐"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국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하면서 미국공학인증프로그램(ABET)과 비슷하게 만든 게 잘못"이라고 덧붙였다. 설계수업을 중시하는 ABET를 들여오면서 설계수업이 필요치 않은 과목까지도 이 수업을 하도록 해 오히려 부작용을 키웠다는 지적이다. 실제 한국공학교육인증원(ABEEK)은 졸업 이수 학점 가운데 18학점 이상을 설계수업에 할당하도록 했다.
서울 소재 한 사립대학 환경공학과 교수는 "폐기물 관리 과목은 폐기물 분류, 관리 등을 배우는 게 더 중요한데 이보다 폐기물 처리장 설계에 치중하는 상황"이라며 "성적의 65%를 차지해 울며 겨자 먹기로 하고 있어 학생과 교수들 모두 불만"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공대 교수는 "기계공학과에선 설계가 필요할지 몰라도 신소재나 화학공학에선 무엇을 설계해야 하는 건지 답답하다"고 말했다.
취업에 도움? 글쎄
공학인증은 일종의 품질인증제도다. 인증을 받은 학생이 공학 실무를 담당할 능력이 있음을 한국공학교육인증원에서 보증하는 것이다. 공학인증을 받으면 비슷한 인증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미국과 일본에 취업할 때도 인정받을 수 있다.
이 제도는 창의적인 산업형 인재 육성이란 취지와 취업에 도움이 될 거란 기대에 공감한 여러 대학들이 2001년부터 도입하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 공학교육인증을 획득한 대학은 2곳이었지만 올해 7월 기준으론 89곳에 달한다. 삼성그룹 19개 계열사, STX그룹 13개 계열사를 비롯해 17개 회사에선 서류ㆍ면접 전형에 10% 가산점을 부여하는 등 공학인증 이수자를 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공과대학학장협의회 핵심 관계자는 "공학인증을 했다고 취업에 도움이 될 거라 보지 않는다"며 "신입사원을 선발할 때 그 사람의 능력을 보지 공학인증 여부를 보겠냐"고 말했다. 공대학장을 지낸 한 사립대 교수는 "공학인증을 하는 대학이 벌써 100여개 가까이 돼 어떤 차별성을 갖는다고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공학인증을 받으면 입사 전형 시 우대하는 한 회사 관계자는 "인증은 말 그대로 인증"이라며 "공학인증을 받지 않아도 뛰어난 사람이 있고, 받아도 뒤처지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융합학문 시대에 어긋나
융합학문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공학인증을 받고 지난해 졸업한 취업준비생 A씨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나오길 바라면서 전공만 듣고 졸업하라는 건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이화여대의 경우 공학인증을 받으려면 졸업이수학점 135학점 중 전공만 111학점을 들어야 해 복수전공 등을 하기가 사실상 힘들다.
융통성 없는 커리큘럼과 취업에 보상이 적다는 이유 등으로 공학인증을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의 비율은 보통 30%에 이른다. 전공에 따라 80% 정도인 곳도 있다. 한국공학교육인증원이 공학인증에 참여하는 31개 공대 2009년 졸업생 15,740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공학인증을 받은 졸업생은 3,451(22.06%)명에 그쳤다.
상황이 이렇자 최근 한국공과대학학장협의회를 중심으로 공학인증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 단체의 장동식 고려대 산업경영공학부 교수는 "한국공학인재상을 설립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며 "무조건 설계를 하라고 할 게 아니라 대학과 전공의 특성에 따라 달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지인 한국공학교육인증원 사무처장(건국대 인터넷미디어학과 교수)은 "공학인증은 들쑥날쑥 했던 교과과정을 표준화해 공학교육의 질을 높여왔다"며 "다만 지금껏 문제가 돼왔던 부분에 대해선 공과대학학장협의회와 논의해 계속 수정 보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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