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18일 차기 대법원장 후보자로 양승태 전 대법관을 지명한 것은 보수적 색채로 대법원을 개혁하고 싶어하는 여권 내부의 열망과 지역안배 필요성, 법원 내부의 분위기 등을 두루 고려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법조계와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양 후보자는 여러 이유로 인사 초기부터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우선 그는 대법관 재임 시절부터 차기 대법원장감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가장 준비된 후보였다. 탁월한 재판실무 능력과 풍부한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으로 사법행정에도 밝다는 것이다. 지난 2월 대법관 6년 임기를 마친 뒤에는 대형 법률회사(로펌)의 러브 콜을 뿌리치고 홀연히 히말라야와 로키산맥 트레킹을 떠날 만큼 자기 관리도 철저했다.
청와대가 인사검증 동의서 제출을 거부한 양 후보자 카드를 잠시 보류한 채 목영준 헌법재판관과 박일환 법원행정처장을 놓고 저울질하다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것은 양 후보자가 대법원장 후보자로서 가진 자질뿐만 아니라 법원 내부에서 확실한 보수로 분류되는 그의 판결 성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 시절 임명된 이용훈 대법원장이 대법원을 한 클릭 왼쪽으로 개혁하고 정권이 교체되어도 입장을 바꾸지 않았던 것처럼, 내년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대법원을 일관되게 보수적으로 바꿀 대법원장을 원해 왔다. 그런 점에서 최근 보수 코드에 맞는 결정을 내려온 목영준 재판관도 고려됐으나, 참여정부 시절 여야 합의 몫으로 헌재에 입성한 전력과 여야 정치인과 두루 친하다는 점 때문에 막판에 밀린 것으로 전해졌다.
PK(부산ㆍ경남) 출신의 양 후보자 낙점은 지역 안배라는 전략적 판단도 고려됐다. 김태호 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하고 신공항 건설이 무산된 이후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대선 후보로 부상하는 등 현 정부에 대한 PK 민심이 안 좋은 상황에서 3부 요인 중 한 명을 PK 인사로 발탁함으로써 지역 민심을 돌려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유력한 후보였던 TK(대구ㆍ경북) 출신의 박일환 법원행정처장 카드가 배제된 것도 같은 이유로 설명이 가능하다. 법조계 관계자는 "권재진 법무부 장관의 발탁으로 TK 편중 인사 논란이 일고 있는데 대법원장까지 TK 출신을 임명하는 것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 후보자는 법원의 반발이 가장 적은 후보라는 점도 인선에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목 재판관을 대법원장에 기용했을 경우 헌법재판소와 사법기관으로서 자존심 경쟁을 벌이고 있는 대법원에 줄 파장이 적지 않다는 우려가 법원 내부에서 많았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색채의 이용훈 대법원장이 퇴임하고 보수적 성향의 양 후보자가 취임하면 사법정책과 판결 기조도 상당히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이미 이명박 정부 들어 새로 임명된 대법관 7명은 모두 50대 남성에 서울대 법대 출신이고, 양창수 대법관을 제외하면 전원 현직 고위 법관이었다. 가뜩이나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라는 가치가 퇴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대법원장마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정통 법관 출신이 기용됐기 때문이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민주화 이후 사회 변화 흐름에 맞춰 소수자나 비주류의 목소리를 나름대로 끌어 안으려 했던 사법부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라고 우려했다. 진보성향 판결을 내려온 박시환ㆍ김지형 대법관이 11월 퇴임하면 이런 흐름은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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