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 나아져도 서민들은 한기… '빈곤화 성장' 틀 깨기 결단 필요
이명박 대통령이 8ㆍ15 경축사에서 '공생발전'을 주창한 배경에는 현재 우리 시장질서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이 대통령은 경축사 곳곳에서 "기존 시장경제는 새로운 단계로 진화해야 한다", "성장과 삶의 질, 경제발전과 사회통합, 국가와 개인의 발전이 함께 가는 새로운 발전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일회성 부양책이나 몇 가지 정책 신설 수준을 뛰어넘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뜻한다.
민간에서는 진작부터 경제와 환경의 조화, 격차를 완화하는 성장 등 새 경제 패러다임에 대한 고민이 있어왔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의 급속한 확대가 초래한 승자독식 구조의 고착화가 우리 사회를 위기로 내몰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문제는 패러다임 변화가 몰고 올 엄청난 충격을 과연 우리 사회가 감내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정부의 재분배 기능 강화해야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우리나라의 현 경제 상황을 '빈곤화 성장'으로 규정한다. 국내총생산(GDP)이 늘고 국민소득은 높아가지만, 다수 국민들의 살림살이는 오히려 빈곤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최근 20~30년간 신자유주의 질서가 동반한 구조적 양극화가 도사리고 있다. 1980년대까지 기업과 비슷하게 7%대 성장세를 보이던 가계소득은 계속 떨어져 이제 정체 또는 마이너스 수준이다. 전체 저축 가운데 기업과 가계의 비중은 2000년 6대4에서 2009년 8대2까지 벌어졌다. 고용 없는 성장 탓에 괜찮은 일자리가 갈수록 줄어 중산층은 축소되고 절대빈곤층은 인구의 15%로 치솟았다. 박 전 총재는 우리나라가 ▦대기업 중심 성장 ▦완전 개방경제 체제 ▦저임금 중국경제의 직접 영향권 등 특성 때문에 전세계를 통틀어 빈곤화 성장이 가장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해법은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탐욕의 시장경제 대신 정부의 조정 역할이 강화된 새로운 경제발전 모델을 갖추는 것이다. 경제를 활성화시켜 일자리를 늘리려면 기업의 투자 확대가 필수적인데, 현금을 움켜쥔 대기업들은 정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래서 박 전 총재는 "증세를 통해 정부가 빈곤층ㆍ실업자 지원 등의 재분배 정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시장을 통해 버는 소득으로 따지면 중산층 비중이 우리보다 훨씬 낮은 북유럽 국가들이 정부의 재분배를 통해 중산층을 두텁게 한 데서 힌트를 얻자는 것이다. 그는 "개인의 부동산ㆍ금융자산과 기업의 이익에 각각 부과하는 '사회보장세'를 신설해 현재 20% 수준에 머물고 있는 담세율을 22%까지 올린다면 재분배에 쓸 연간 20조~30조원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우리를 비롯한 세계 자본주의는 지금 지속가능성을 의심받는 기로에 서 있다. 특단의 정치적 결단과 노력 없이는 계속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원로학자의 충심 어린 고언이다.
기업에도 새 패러다임을
자본주의 최일선에 서 있는 기업부터 새 패러다임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각자의 이윤추구 활동이 조화를 이뤄 전체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신개념' 기업들의 역할을 대폭 확대한다면 지금의 승자독식 부작용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대표적인 모델이 '사회적 기업'이다. 스스로 수익구조를 갖춘 사업을 벌이면서 수익의 일부 또는 전부를 공익적 목적에 사용하는 사회적 기업은 봉사나 사회공헌 활동뿐 아니라 고용창출 같은 경제적 효과를 위해서도 존재할 수 있다.
권영준 경희대 교수는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도 경제자유와 정의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방안을 도출해내야 한다"며 "사회적 기업 육성 등을 통한 공동체 자본주의는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대안"이라고 말했다. 권 교수는 이를 위해 기존 대기업들은 자발적으로 고용 확대, 성과공유제, 장학재단 설립 등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정부는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등으로 사회적 기업들의 성장을 저해하는 대기업을 견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기업에 의존하는 고용과 투자가 점점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만큼, 벤처기업 특유의 활력을 국가 차원에서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벤처열풍 초기인 1990년대 일부 기업인들의 부패 등으로 부정적 이미지가 남아있긴 하지만, 국가 성장동력이 가라앉고 청년실업 문제가 장기화하는 현 시점에서 벤처기업 육성만한 해법은 없다"고 말했다. 이민화 카이스트 초빙교수는 "코스닥 적자기업에 상장을 허용하고 엔젤 투자자에 대한 세제혜택 확대, 인재 조달을 위한 주식 옵션제 등 초기 벤처기업 육성 당시의 지원책들을 원상회복 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한때 영ㆍ미식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떠올랐던 북유럽식(일명 노르딕) 자본주의를 우리 실정에 맞게 적용할 필요성도 제안됐다. 이민화 교수는 "고신뢰ㆍ고투명성 사회를 전제로 한 북유럽 모델을 우리 실정에 그대로 적용하긴 어렵다"면서도 "그들의 평생교육과 일자리 나누기 시스템 같은 장점은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 지구촌 자유주의 대안 모델 봇물
금융위기의 광풍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세계 경제를 진두지휘 해 온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일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파산 선고가 내려졌다'는 일각의 평가 속에 시장경제의 새 발전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일부 국가들은 이미 신자유주의를 벗어 던지고 저마다의 대안 모델을 운영 중이다.
미국과 함께 주요 2개국(G2)으로 떠오른 중국은 비(非)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성장 전략인 '베이징 컨센서스'를 내세웠다. 2004년 라모 칭화(淸華)대 교수가 처음 개념화한 베이징 컨센서스는 정부 주도의 시장경제 발전 모델로, 각국이 독자적 가치를 유지하며 세계 경제체제에 편입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워싱턴포스트(WP)는 중국의 높아진 위상을 열거하며 "베이징 컨센서스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인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노르딕(Nordicㆍ북유럽) 모델'도 시선을 끌고 있다.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은 1990년대 초 부동산 거품 붕괴로 고장 난 은행 시스템을 국유화하는 등 정부의 역할 강화를 통해 경제위기에서 탈출했다. 과세를 통한 재분배 정책 강화와 의료ㆍ실업 대책 등 공공지출 확대로 요약되는 노르딕 모델은 사회주의적 요소가 가미돼 '혼합 시장경제'로도 불린다. 세계 최대의 휴대폰 제조업체 노키아의 요르마 올릴라 회장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세계화로 인한 지나친 개방에 맞선 정부의 강력한 국민 보호 프로그램과 평등한 교육 시스템을 특징으로 하는 게 노르딕 자본주의"라고 설명하고 "노르딕 모델은 자본주의의 미래"라고 단언했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뒤인 1990년대 말부터 신자유주의 흐름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경제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빈부 격차가 심화하면서 사회는 더욱 불안해져, 또 다른 10년을 잃어버려야 했다. 경제학자 나카타니 이와오(中谷嚴)는 저서 에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가 가진 격차를 심화시키고 환경을 파괴하는 '악마적 맷돌'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며 인간적인 자본주의, 정부가 조정 역할을 하는 자본주의를 주창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테마 아래 환경과 사회를 중시하는 생태지향적 모델인 '에코타운 정책'을 수립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척점에 있는 경제와 환경이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다.
마이크로소프트(MS) 설립자인 빌 게이츠가 내놓은 '창조적 자본주의'와 아나톨 칼레츠키의 도 신자유주의의 대안 개념이다. 게이츠는 2008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21세기를 위한 자본주의는 시장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며 "기업들과 비정부 조직이 함께 전 세계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시장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현명한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더 넓은 사회 이익으로 되돌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격차를 줄이는 발전, 일자리를 늘리는 성장, 서로를 따뜻하게 보살피는 사회 등이 핵심의제인 '자본주의 4.0'역시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성기 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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