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마다 반복되는 휴대전화 알람을 짜증스레 눌러 끄고, 멀찍이 둔 자명종 소리를 베개로 틀어막고, 정해둔 시간이면 저절로 켜지는 형광등 불빛에 한참 얼굴을 찌푸리고 나면 또 하루가 시작된다. 도리 없는 도시생활자의 일상. 눈 뜨는 순간부터 피곤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복작이는 인파 속에 전쟁 치르듯 지나간 휴가도 언제였나 벌써 가물가물하다. 팔다리는 무지근하고 머릿속은 푸석하다. 바람은 오직 하나. 간절히, 쉬고 싶다.
"내가 너에게 새 영을 줄 것이다. 너에게서 돌 같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에스겔 36:26)
피세정념(避世靜念), 줄여서 피정은 '세상의 번다함을 떠나 고요한 마음을 지닌다'는 뜻을 지닌 가톨릭 수행 방법의 하나다. '세속을 피해 고요함을 따른다'는 의미의 피속추정(避俗追靜)이 줄어든 말이라는 설명도 있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 땅 목수의 아들이 저자를 떠나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한 것에서 유래, 기독(基督)의 세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제 피정은 종교의 틀을 벗어나 있다. 영혼의 안식과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린, 침묵 속으로의 여행이다.
강원도 횡성으로 갔다. 중앙분리대를 친 4차선으로 확장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로 귀가 멍멍한 경기도 양평을 벗어나, 6번 국도가 2차선으로 사행(蛇行)하기 시작하면 횡성땅 초입이다. 거기서 나직한 재를 하나 넘으면 풍수원성당이 있다. 영동고속도로의 체증을 피해서, 가끔은 느릿느릿 자동차를 몰고 싶어서 6번 국도를 타고 다니다 알게 된 곳이다. 무거운 생각을 툭 내려놓고 쉴 곳을 생각하자 제일 먼저 이곳이 떠올랐다. 아무 기별 없이 갔는데, 푸근한 모습의 성당이 '이제 오느냐'고 묻는 듯했다.
풍수원성당은 1905년 착공, 1909년 낙성했으니 일백년 하고도 몇 해 더 묵었다.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든 천주의 자식들이 화전 일구고 옹기 구워 판 돈으로 벽돌 찍고 들보 깎아 만든 집이다. 만만찮았던 지난 한 세기의 풍파에 고딕의 첨탑이 무너지지 않은 것보다, 화전민의 얼굴빛을 연상케하는 벽돌이 등자열매 빛깔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그 벽에 기대 앉자 매봉산의 등성마루가 눈에 들어온다. 녹색이 서서히 지쳐가는 늦여름의 산이 어설픈 피정객의 마음에 후덕한 그늘을 드리웠다.
"나를 찾아라. 그리하면 발견할 것이다. 네가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찾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예레미아 29:13)
풍수원성당엔 피정을 위한 숙박 공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문을 닫았다. 성당과 주변을 성역화하는 바이블파크를 건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유현초등학교 금대분교를 찾아갔다. 폐교로 남아 있던 이곳을 2007년 풍수원성당 김승오 주임신부가 건축가 김정원씨와 함께 한옥의 정서를 담은 묵상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세 칸으로 된 교실의 가장 안쪽이 김 신부의 방이다. 벽에 걸린 칠흑빛 수사복과 앉은뱅이 책상 하나, 다탁과 방석 몇 개가 전부인 검박한 공간이다. 이곳에 머무는 것을 허락 받았다.
산중의 해는 일찍 넘어가고 툭툭 유리창에 튕기는 빗소리 외엔 오감의 어떤 자극도 없다. 여여(如如)한 침묵. 가져간 책을 들척거려 보지만 맥락도 없이 사방으로 가지 치는 사념이 글자를 가린다. 탁세에 물든 검은 마음에 피세정념이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좀체 가라앉지 않는 생각의 꼬투리와 씨름하다가 방을 나와 우산을 폈다. 블루베리 농장으로 바뀐 폐교 운동장을 걷다 이웃에서 키우는 소와 눈이 마주쳤다. 참으로 오랜 만에 보는 깊고 고요한 수정체. 그 투명한 동그라미에 무얼 찾는지도 모른 채 강박에 얽혀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되비쳤다.
"지진과 불이 지나간 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열왕기 상 19:11~13)
이튿날 새벽, 매미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평소 휴대전화 알람이 울리는 시간보다 두 시간 이른 시간이다. 둔한 귀에도 그 소리에 가을 벌레 울음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다시 성당으로 향했다. 공기는 한없이 정갈했다. 검정 파랑 보라 물감을 푼 듯한 하늘에 산새소리가 스미기 시작하는 시간, 기역자로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 분이 무릎을 짚고 야트막한 성당 언덕을 올라왔다. "거기도 기도하러 오셨어요?" 영서지방 사투리로 할머니가 물었다. 대답할 말을 찾아 우물거리는데 할머니가 손을 잡았다. 사념을 벗어버리지 못한 피정객의 손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걸로 족했다. 햇살이 새벽 숲의 안개를 걷어내기 전, 서울로 돌아가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횡성=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횡성의 숨은 쉼터 , 한옥연구소와 자작나무숲미술관
쉴 휴(休). 강원 횡성군은 사람이 나무에 기댄 모습을 본뜬 이 글자가 퍽 어울리는 곳이다. 떠들썩한 유명 관광지가 없어 여름철에도 그다지 붐비지 않는다. 덕분에 둥치 굵은 나무 그늘에서 한나절 일상의 고민을 잊을 만한 고장이다. 천혜 절경이니 테마체험이니 하는 부박한 선전에 현혹되지 않는 여행의 고수들에겐 언제나 편안한 안뜰 같은 곳. 그 가운데 사람의 땀으로 만든 두 곳을 소개한다.
자작나무숲미술관
우천면 두곡리 둑실마을 깊숙이 들어가면 백색 수피를 지닌 자작나무가 밀생하고 있다. 자생하는 숲이 아니라 사진작가 원종호(58) 관장이 20여년 전부터 심고 가꾼 나무들이다. 호미로 산을 파고 1만 2,000여 그루의 묘목을 하나하나 직접 심었다. 현재 4,000그루 가까이 살아있다. 숲뿐 아니라 전시관 두 동 중 하나와 카페로 쓰는 스튜디오갤러리 한 동은 전국 곳곳에서 찍은 자작나무 사진으로 가득하다.
“잎 지면 흰 줄기만 남아요. 자작나무는 100년을 자라도 둘레 길이가 90cm를 넘지 않죠. 그 가냘픈 백색에 매료됐습니다. 애잔하고 쓸쓸한, 하지만 강력한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백색이죠.”
원 관장은 1990년 백두산을 다녀온 뒤 자작나무 군락을 본 충격에 고향인 둑실마을에 터를 잡고 우직하게 자작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의 자작나무 사랑은 극진하다. 집과 미술관을 지으면서도 “자식 같은 나무를 자를 수 없어” 건물 바닥과 천장에 구멍을 뚫는 난공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미술관으로 가려면 차도에서 벗어나 논둑 비포장길을 1.5km 가량 가야 한다. 그런데 거기서 적지 않은 여행객이 그냥 발길을 돌린다. 성인 1만원을 받는 입장료가 버거워서다. 원 관장은 그것도 자작나무를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처음엔 무료로 하고 이후 2,000원의 입장료를 받았는데 몰려드는 관람객들 때문에 나무들이 몸살을 앓았어요. 그래서 2년 전부터 입장료를 대폭 올렸습니다. 그 덕에 평일엔 관람객이 한 명도 없는 날도 있어요. 전 지금도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제초제, 살충제,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는 미술관 숲 속에선 먹을 수 있는 식물이라면 씻지 않고 그냥 뜯어먹어도 된다. 관람객의 동선과 조금 떨어진 곳에 게스트하우스 두 채가 있다. 각각 한 가족의 숙박객만, 숲의 고요를 깨뜨리지 않을 사람들만 골라 받는다. 문의 (033)342-6833, 홈페이지(www.jjsoup.com).
김정원한옥연구소
찾기가 쉽지 않다. 가는 길에 안내판 하나 없다. 양평에서 6번 국도를 타고 횡성 읍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농협과 주유소가 있는 복지골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우회전해 3km 정도 더 가면 왼쪽 밭 너머 연구소가 숨어 있다. 인테리어 건축 디자이너 김정원(57) 소장이 폐교된 유현초등학교 금대분교를 고쳐 연구소로 만든 곳이다. 본래 풍수원성당 김승오 신부가 귀농운동을 위한 공간으로 쓰려던 곳이지만, 지금은 한옥의 정서를 바탕으로 의식주 문화운동을 펴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감탄스럽다구요? 여기 오면 흔히들 그러죠. ‘한옥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몰랐다’고. 그런데 자세히 보세요. 여긴 원래 한옥이 아니라 폐교를 개조한 공간입니다. 무슨 뜻인 줄 아시겠어요? 우리는 한옥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한옥의 정서 속에 살고 싶어하는 거예요.”
말을 듣고 보니 연구소 안에서 전통 한옥의 개념에 부합하는 것은 거의 없다. 기둥과 보를 폐가된 고옥에서 뜯어와 붙였지만,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세 겹으로 황토를 바른 벽, 종이 푸대를 깔아 콩댐을 먹인 듯하게 만든 바닥만으로도 한옥에 대한 향수를 한껏 자극한다. 낡은 영국산 오디오와 고색창연한 선풍기, 독일에서 수입한 목제 의자도 이 ‘한옥의 정서’ 속에선 옻칠한 문갑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많은 돈과 너른 땅을 가진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호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한옥에서의 삶은 마음먹기에 따라 서민들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노출 콘크리트 건물에도 한옥의 정서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 정서를 많은 사람들과 나눌 방법을 고민 중입니다.”
낡은 목재와 한국 전통의 누런 빛깔, 그리고 한지를 덧댄 간단한 조명만으로 얼마나 충만한 한옥의 정서를 창조할 수 있는지 이곳에 와보면 절절히 깨닫게 된다. 김 소장은 그 방법론을 매뉴얼로 만들어 홈페이지(http://gaeulmania.co.kr)를 통해 공개할 계획이다. 연구소에선 김 소장이 직접 재배한 농산물로 차려주는 음료와 간식도 쏠쏠한 덤으로 즐길 수 있다.
횡성=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가톨릭 피정 프로그램 "신자 아니어도 문 활짝"
아직 불교의 템플스테이만큼 일반화하지 않았지만 가톨릭 피정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 따르면 2005년 88곳이던 전국 '피정의 집'은 올해 133곳으로 늘어났다. 휴가철을 이용한 피정 프로그램의 숫자는 3배가량 늘었다. 주교회의는 "피정은 본래 하느님과 영적인 만남을 위해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심리적 영적 재충전을 원하는 모든 이에게 문이 활짝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피정은 성서를 정독하고 묵상하는 렉시오 디비나(성독ㆍ聖讀)나 향심기도처럼 전통적 가톨릭 수련법을 배우는 피정에서부터, 젊은이들이 수도자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해보는 체험 피정, 가족 단위로 참가할 수 있는 가족피정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개인피정은 특별한 프로그램 없이 독서나 묵상을 하는 것인데, 하루 몇 차례 있는 공동기도에는 참석하는 것이 가톨릭 문화를 접하는 좋은 경험이 된다. 휴식형 템플스테이 중에도 새벽예불과 사시예불 정도는 참석하길 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많은 피정 프로그램이 여름 휴가철에 집중돼 있지만 연중 운영하는 곳도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매월 12일에 성인 수도생활 체험학교를 연다. 이웃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신앙이 없는 사람도 참가할 수 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는 매월 첫째 토요일에 서울 정릉 수도원에서 1일 수도원 체험 행사를 연다. 피정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는 천주교 주교회의(www.cbck.or.kr)나 각 교구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피정과 관계 없이 성당 안에서 숙박을 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충남 보령시 대천 해수욕장에 있는 요나성당, 전북 김제시 수류성당은 수려한 자연 경관 속에서 가톨릭의 고요함을 느낄 수 있도록 개방된 성당이다. 천주교 광주대교구는 교구 내 공소(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 12곳을 여름철 숙박을 원하는 일반인들에게 개방 중이다. 월출산 자락의 시종공소, 슬로시티 증도가 지척인 지도공소 등이 포함된다. 문의 요나성당 (041)934-7758, 수류성당 (063)544-5652, 천주교 광주대교구 공소사목국 (062)380-2831.
유상호기자 shy@hk.co.kr
■ 여행수첩/ 횡성
●중앙고속도로 횡성IC나 영동고속도로 원주, 새말 IC를 빠져나오면 횡성에 닿는다. 풍수원성당은 군청이 있는 횡성 읍내에서 6번 국도를 타고 양평 방향으로 차로 20~30분 달리면 오른편에 있다. 서울 강북 지역에서 출발한다면 북부간선도로와 연결되는 6번 국도를 타고 양평을 거쳐 가는 편이 수월하다. 풍수원성당 (033)342-0035.
●횡성에는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에 적당한 공간이 산재해 있다. 태기산에서 발원한 섬강이 기암괴석을 끼고 도는 섬강유원지, 시원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횡성댐, 어답산 자락의 들꽃이 유명한 병지방계곡 등이 읍내에서 멀지 않다. 문의 횡성군청 문화체육과 (033)340-2225.
●맑은 공기 덕에 별빛이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해발 300m 계곡에 위치한 사설 천문대인 우리별천문대는 가족 단위의 소규모 관람에 적당하고, 천문인마을은 사진 동호회의 촬영 장소나 아마추어 천문인의 연구 장소로 유명하다. 우리별천문대 (033)345-8471. 천문인마을 (033)342-9023.
●횡성은 조선시대부터 '동대문 밖 가장 큰 우시장'으로 불릴 만큼 쇠고기로 유명하다. 국내 최고의 맛과 품질을 자랑하는 한우를 싼값에 즐길 수 있다. 10월 5~9일엔 섬강 둔치 일원에서 제7회 횡성한우축제가 열린다. 문의 횡성군청 축산과 (033)340-2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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