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자람 "판소리 정서가 한이라는 데엔 정말 반대…그 안엔 희로애락 다 있죠"
가히 '이자람 현상'이라 할 만하다. 대중에게는 여전히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로 시작하는 동요 '내 이름'을 부른 꼬마숙녀로 더 친숙하지만 어느새 젊은 소리꾼 이자람(32)은 누구나 손꼽는 국악의 미래로 성장했다.
2007년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재창작한 판소리극 '사천가'를 극작, 작창, 음악감독, 출연까지 도맡아 선보이더니, 올해 6월에는 역시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각색한 판소리극 '억척가'로 화제를 모았다. 작곡과 작창은 기본이고 1인 15역의 연기까지 훌륭히 소화한 '억척가'는 국악 공연으로는 보기 드물게 전회 매진됐다.
현대적인 그의 판소리극을 향한 국외의 관심도 뜨거워 '사천가'는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초청 공연을 가졌다. 프랑스어 희곡집으로도 발간됐고 지난달 전세계 공연 관계자들이 모인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오프에서 공연됐다.
9월 열리는 판소리 갈라쇼 '노래하는 이자람, 그녀의 판소리'와 10월에 있을 '사천가' 재공연 준비로 바쁜 그를 집단 인터뷰 장으로 초대했다.
_아비뇽 공연의 성과가 궁금하다.
"소리꾼 후계자 이승희, 김소진과 함께 참여하면서 훌륭한 판소리의 테크닉과 연기를 소화할 수 있는 소리꾼이 한국에 많다는 사실을 알린 게 기쁘다. 나는 닷새 간 공연을 했는데 사흘째부터 기립 박수가 나왔고 마지막 날에는 공연 도중 관객들이 기립 박수를 쳐 잠시 중단한 일도 있었다. 프랑스 마르세이유, 이스라엘, 싱가포르, 독일 등지의 여러 공연 단체에서 초청 의사를 밝혀 일정을 조정 중이다."
_'사천가' '억척가'는 어떻게 탄생했나.
"'사천가'의 발단은 '판소리가 21세기까지 창작됐다면 어떤 것을 사용했을까'라는 의문이다. 판소리가 시조나 민요 같은 당대의 좋은 것들을 써서 엮은 형태인 만큼 오늘날 사용할 수 있는 조명, 음향 등을 적극 활용하려 했다. 반면 '억척가'는 전통 판소리 중에서도 음악이 가진 깊이, 사설이 가진 깊이의 맛을 내보려고 했다. '사천가'가 멋모르고 만든 '이 시대의 판소리라면 어떨까'였다면 '억척가'는 '사천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깊이 있게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작창이나 대본 작업에 적벽가의 좋은 대목을 많이 듣고 연구하고 대본과 가사를 봐 가며 만들었다."
_수많은 작가 중 왜 브레히트의 작품이었나.
"'사천가'를 만들 때만 해도 브레히트가 누구인지 잘 몰랐다. 연극이라는 장르에 동경심과 경외감, 열등감이 있었고 희곡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몰랐던 때다. 다만 연출자와 착하게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던 중 우연찮게 '사천의 선인'을 선택하게 됐다. 이후에 브레히트 관련 논문을 찾아보고 위대한 작가임을 알았다."
_그럼 '억척가'는 브레히트에 대한 존경심 때문인가.
"실은 '사천가' 공연을 마치고 나니 브레히트를 잘 모르고 만들었는데 '판소리와 브레히트의 만남'에 집중되는 게 부담스럽더라. 그래서 처음부터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차기작으로 염두에 뒀지만 오히려 브레히트를 피하려고 망설였다. 일부러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고전을 많이 찾아 읽었다. 브레히트를 피하고 싶었지만 내 마음이 자꾸 '억척가'를 하라고 하더라.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자니 아무 일도 못하겠기에 남 신경 안 쓰고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선택하게 됐다."
_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나 보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다기보다 내가 사는 사회에 관심이 많다. 내가 사는 일에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사회의 문제를 관심 있게 볼 것 같다. 특별히 진보적인 성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_우리 시대를 직접적으로 논하는 판소리도 만들 수 있다는 건가.
"판소리 만들 때는 순서가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가 제일 먼저다. 내 마음의 갈등이 무엇이고 어떻게 지인과 이야기하고 싶은가가 시발점이다. 그런데 시대를 풍자하려고 판소리를 만들지는 않지만 내가 사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풍자를 하게 되더라."
_현대적인 판소리를 시도한 것에 대해 국악계의 반대는 없었나. 정통성의 시비랄까.
"국악하는 어르신께 직접적으로 들은 적은 없다."
_간접적으로는 들었다는 건가.
"국악평론가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이자람이 정통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다. 물론 당황스러웠다. 나는 지금도 인간문화재 송순섭 선생님의 교육을 받고 있는데 화려하게 비치는 외부 활동만 보신 것 같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비판을 들은 게 아니어서 개의치 않고 그저 내 발전의 거름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 분들은 아마 내가 소리 레슨을 하지 않는 것도 모를 것이다."
_돈 버는 일인데 레슨은 왜 안 하나.
"돈을 쉽게 벌 수는 있겠지만… 내가 가는 길이 앞으?판소리를 할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국악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해 서울대에서 학사, 석사를 마쳤고 상도 많이 받았다. 어떻게 보면 판소리에서 정도를 걸었다.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제자를 양성하고 교수가 되는 것보다 좀 더 좋은 소리를 만들어 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봤다. 내가 판소리가 좋았던 이유는 동시대성이었다. 그 동시대성을 지금 살려낸다면 더욱 재미있게 판소리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자람이 국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예솔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절이다. 어린이 국악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첫 스승인 고 은희진 명창을 만났다. 인간문화재 고 오정숙 명창과 송순섭 명창에게도 소리를 배웠다. 지금도 송 명창에게 흥보가를 배우고 있다.
국악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최연소, 최장기 판소리 완창'으로 세계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국악 한 가지 영역에 머물기에는 주체 못할 끼를 품고 있다. 현대무용 공연에 무용수로 참여하기도 했고 밴드 활동도 하고 있다. 아비뇽에서 돌아온 직후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보컬로 공연을 했고 현재 밴드의 앨범을 녹음 중이다.
_'사천가'와 '억척가'의 1인 다역 연기를 보니 그 끼를 어떻게 참고 지내나 싶다. 국악을 하면 절제하는 생활을 하지 않나.
"전혀 그렇지 않다. 끼가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관심사가 생기면 그냥 두지는 않는 성격이다. 희곡에 흥미가 생기면 찾아 읽고 관련 강좌를 청강하고 무대화할 방법을 생각해 본다. 움직임을 배우고 싶으면 현대무용 워크숍에 참여해 보고 그러다 운이 좋아 현대무용 공연에 무용수로 서 보기도 했다."
_예솔이를 기억하는 기성세대는 참 잘 자란 유명인으로 인식할 것 같다.
"글쎄, '사천가'나 '억척가'가 지금처럼 회자되지 않고 내가 현대무용에 무용수로 참여하고 있을 때 어르신들이 나를 봤다면 '엉뚱한 짓 하고 있네'라고 했을 것이다."
_진짜 '엉뚱한 짓' 도 해 봤나. 나이트클럽에 간다거나.
"고등학교 때 가 봤다. 남자도 항상 만났고 열심히 놀았다. 열심히 연애하고 노는 것도 좋아한다. 특별히 절제한 것은 없다. 딱 하나 신경 쓰는 것은 몸 관리다. '억척가'를 하면서 건강을 지키는 게 이 작품을 지키는 일임을 깨달았다."
_밴드 활동도 하는데.
"내게는 나이트클럽보다 밴드 공연하는 클럽이 더 흥미로웠고 클럽 문화보다 몸을 움직이는 무용수가 더 멋있었던 게 사실이다. 고등학교 때 홍대 앞에 밴드가 직접 연주하는 클럽을 처음 가 봤다. 너무 부럽고 자유로워 보였다. 작은 공간에서 기타를 갖고 마음대로 노니는 이런 문화를 언젠가는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록음악 동아리를 찾아 다녔는데 통기타가 널브러져 있어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이 노래패 메아리였다. 거기서 기타를 배우고 자작곡을 만들기 시작한 게 아마도이자람밴드의 전신이다."
_이름이 특이하다. 아마도이자람밴드.
"밴드 이름이 없을 때 페스티벌에 나가게 됐다. 프로그램에 이름을 실어야 한다고 빨리 알려달라고 하길래 '아마도, 이자람 밴드 정도가 이야기되고 있는데 정해진 것은 없다'고 했더니 그대로 '아마도이자람밴드'라고 실어 버리더라. 그래서 그냥 고맙게 생각하고 그 이름을 썼다. 이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이자람의 판소리가 주목 받는 이유는 '판소리는 고루하다'는 편견을 깼기 때문이다. '사천가'와 '억척가'는 특히 20, 30대 관객이 열광했다. 젊은 소리꾼으로서 그는 대중이 품고 있는 판소리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싶어했다.
_'서편제' 등 영화 때문에 판소리의 정서가 한이라는 대중적 인식이 강하다.
"판소리의 정서가 한이라는 것에는 정말 반대다. 판소리를 논할 때 음악만 논할 수 없듯이 판소리는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한의 정서만 이야기 하겠는가. 사람의 삶에는 희로애락이 다 있듯 판소리도 신명 날 때 신명 나게 놀고, 풍자할 때 풍자하고, 화날 때 화내는 것이다."
_피를 토하지 않아도 할 수 있나.
"피를 토하면 죽는 것 아닌가. 연습을 많이 하면 목에 염증이 생기고 고름이 터진다. 이를 피 토했다고 표현하는데 잘못된 상식일 뿐이다."
_소설 '서편제'에서는 한 맺힌 소리를 위해 멀쩡한 눈을 멀게 하지 않나.
"너무 폭력적이다. 이청준 선생의 문학이기에 용서 가능한 것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_'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나.
"어느 부분은 맞다. 하지만 한국적이기 전에 내가 있어야 하지 않나. '사천가'의 뚱뚱한 여자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며 겪는 아이러니를 프랑스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상하더라. 한국적이라 할 수 있는 판소리의 테크닉을 이야기의 틀에 넣었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가 난 것이다. 가장 나다운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_본인?작품이 50년, 100년 후에도 살아남는 고전이 될까.
"'억척가'는 분명히 살아남을 것이고 꼭 그랬으면 좋겠다. 판소리가 본래 지닌 음악적인 매력을 표현하고자 했고 거기에 판소리를 배운 사람만 낼 수 있는 모든 창법을 사용해서 아들의 죽음 장면, 딸의 죽음 장면 등을 모두 음악적, 연극적으로 만들어 냈다. 소리꾼이라면, 또 '억척가'를 봤다면 '한 번쯤 무대 위에서 저 소리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날 것이다."
_앞으로의 목표는.
"일단 건강해지고 싶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지켜서 '사천가'와 '억척가'를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잘 해내고 싶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지금처럼 서로 바라보고 믿어 주고 좋아하고 그렇게 살고 싶다. 죽기 전에 내가 스스로 다 써 낸 판소리를 만들고 싶은 것도 꿈이다. 새로 썼다 해도 어쨌든 '사천가'와 '억척가'는 뼈대를 어디선가 가져 온 것이니까 내공을 키워 언젠가는 그 뼈대를 스스로 만들고 싶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
유상호 기자 shy@hk.co.kr
김현우 기자 777hyunwoo@hk.co.kr
백경민 인턴기자 (중앙대 문예창작학과3)
■ 이자람, 뮤지컬·무용극·밴드활동…"질투는 나의 힘"
이자람은 전방위 예술가다. 판소리와 무용극 참여, 밴드 활동 외에 지난해에는 뮤지컬에도 출연했다. 판소리를 소재로 한 뮤지컬 '서편제'의 주인공 송화를 맡아 뮤지컬 시상식에서 여자신인상을 받았다.
이자람이 다방면에서, 그것도 실력을 인정받으며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한 마디로 딱 부러지게 답할 수는 없겠지만, 인터뷰 중 그가 자주 입에 올렸던 "질투가 난다"는 말에서 그 비결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작가 브레히트의 작품 세계를 처음 알게 됐을 때 "젊은 나이에 이런 훌륭한 희곡을 썼다는 사실이 부럽고 질투가 났다"고 했고, 아마도이자람밴드가 소속된 붕가붕가레코드의 다른 가수가 "내 옆에서 놀다가 멋진 곡을 써서 앨범이 나오면 조급해진다"고 했다.
그는 "질투가 나는 것은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주변 모든 자극에 촉수를 세운다. 요즘은 작가 정유정, 김애란의 소설과 그룹 투애니원의 '내가 제일 잘 나가'에 관심이 많다. 정유정의 이 놀라웠고 그래서 찾은 에서도 자극을 받았다. 추천 받아 읽어 본 김애란의 에서도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서 부러운 부분이 무엇인지 늘 구체적으로 생각한다. 부러운 마음을 자신의 강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다.
그 때문에 "너무 내 위주라는 말을 듣는다"고 했다. "내 마음이 어떤지,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를 살피며 내 마음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순간을 기억하고 기록해 작품에 넣는다"고도 했다.
"완벽주의자에 질투가 많아 늘 스스로를 들들 볶는다"는 이자람은 "때로 지치고 신세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적벽가' 중 죽은 병사들이 새가 돼 우는 새타령을 부르며 감정을 정화한다"고 말했다. 스트레스마저 예술로 극복하는 이 젊은 소리꾼을, 앞으로 더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더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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