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살랑거렸다. 조명이 꺼지고 흑백의 빛이 스크린에서 일렁이자 옆 사람과 도란거리던 3,000여 관객들은 시선을 한 곳으로 집중했다.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사라진 무성영화였지만 감성은 충만했다. 영화 속 개구쟁이 어린이들의 행동은 관객들의 웃음을 불렀고,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아버지의 고단한 일상은 마음을 눌렀다. 중국계 미국인 라일리 리가 연주한 일본 전통 피리 사쿠하치의 선율은 가랑비처럼 관객의 마음을 적시며 영화의 정서를 온전히 전했다.
99년 전 만들어진, 스스로를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소개하는 일본의 고전영화 '태어나긴 했지만'(감독 오즈 야스지로)은 그렇게 시간을 초월해 관객의 마음을 잡았다. 영화 막바지 습기 때문에 영사기에 불이 붙어 필름이 타는 장면이 고스란히 스크린에 투영된 작은 불상사마저 영화 '시네마천국'을 떠올리게 하며 추억을 자극했다. 지난 13일 저녁 충북 제천시 청풍호반에서 열린 제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야외 영화 상영회는 영원한 고전의 풍취를 한껏 느끼게 해준 특별한 자리였다.
한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태어나긴 했지만'은 1932년 일본 개봉 당시 내용이 어둡다는 이유로 도쿄에서는 2개월 동안 상영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 영화전문지 키네마 준포가 꼽은 그 해 최고의 영화가 됐다. 저작권을 보유한 일본 영화사 쇼치쿠에 주어진 이날 상영비(1회)만 약 110만 가량. 묘비에 '없을 무(無)' 한 자만을 남기고 떠난 거장 오즈 야스지로(1903~1963)는 죽어서도 여전히 영화사 지갑을 채워주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7월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 탄생 100주년 특별전도 고전의 힘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 행사다.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 21편이 스크린을 채운 이 행사에 든 경비는 약 1억4,000만원이다. 이 중 5,000만원 가량이 상영비 명목으로 일본 영화사들 계좌로 입금됐다.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의 1년 운영비는 대략 2억원.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상영비를 포함한 1억원 가량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열리지 못할 특별전이었다. 제천영화제의 '태어나긴 했지만' 상영도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거장은 오래 전 흙으로 돌아갔지만 영화는 사라지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꾸준히 상영되며 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고전들 뿐 아니라 요즘 만들어진 영화들도 영화제 등에서 상영될 때 상영비를 따로 챙긴다. 하지만 고전일수록 상영비가 비싸고 갈수록 올라가는 추세란다. 상영 1회당 100만~150만원 정도다. 시간을 견뎌내면서도 여전히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빛을 발하는 상품은 콘텐츠뿐인 듯하다. 영화의 힘을 새삼 절감한 제천영화제였다.
제천에서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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