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감세 없애고 토목 줄이면 빚 안늘고 복지 가능하다
과도한 국가부채로 미국과 유럽경제가 몸살을 앓으면서 복지를 희생양으로 지목하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그리스 포르투갈 등 악화일로의 남유럽 상황은 '복지 망국론'의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무분별하고 과도한 복지가 결국 나라를 망칠 수 있으니 반면교사로 삼아 재정을 탄탄히 하는 등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재정위기의 원인을 과다한 복지 지출로 몰아갈 경우 지나친 단순화의 논리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복지 과잉'이 아니라 '기초복지'도 부족한 복지 후진국인 만큼,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걸맞은 복지체제를 갖추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특히 나라 재정은 여러 정책의 조합인 만큼 불필요한 부분을 줄여나간다면 재정건전성과 복지는 충분히 양립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 글로벌 재정위기가 곧 우리의 재정위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 박기백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최근 위기에도 우리나라 국채 가격에 큰 문제가 없고 외국인들이 오히려 더 많이 사는 걸 보면 우려할 수준이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박종규 국회예산처 경제분석실장은 "미국은 잇따른 전쟁에 따른 국방비 증가와 감세(減稅), 그리스는 농업기반 경제구조, 섣부른 유럽연합(EU) 가입 등 (복지 이외의)다른 요인이 재정을 악화시켰다"며 "복지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재정위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복지 강화→재정 악화'라는 공식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는 얘기다.
재정의 우선 순위를 살피면 복지가 오히려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일조할 수 있다는 의견도 많았다. 이영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복지를 줄이는 게 아니라, 복지를 늘리기 위해 재정건전성을 좋게 가져가야 할 시점"이라며 "경제위기에 따른 피해는 결국 복지 혜택이 절실한 저소득층에게 집중되는 만큼 우선은 복지 사각지대 해소에 초점을 맞춰야 하다"고 지적했다. 이원희 한경대 행정학과 교수도 "사회적 수요 측면에서 복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므로 증세(增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복지사회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기백 교수는 세수 확보 방안과 관련, "점진적인 부자감세 철회(증세)와 4대강 사업 등 불요불급한 토목사업을 줄이면 굳이 빚을 늘리지 않고도 복지 울타리를 촘촘히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영 교수는 "지나친 증세가 아니더라도 공제항목 축소, 주식 양도차익 등 자본이득에 대한 과세, 개인소득세 누진 적용 등을 통해 세수를 마련한다면 재정건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수준에 맞는 복지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최근 정치권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복지 공약에 대해선 대부분 경계했다. 당장의 재원 마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속 가능한지 여부를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형수 조세연구원 재정분석센터장은 "복지 정책도 중요하지만 내년 선거를 앞두고 복지 얘기가 너무 단발성으로 남발되는 것은 위험하다"며 "이슈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운용 체계, 재원 조달 문제 등을 큰 틀에서 살펴 미래 재정에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자격만 있으면 무조건 지원 받는 '자격급여' 복지는 장기적인 재정구조를 감안해야 한다"(이원희 교수), "10년, 20년 뒤의 우리 재정이 우려되는 건 사실인 만큼 실력에 맞는 복지를 짜야 한다"(박종규 실장)라는 의견도 있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강아름기자 saram@hk.co.kr
■ 내년 예산 편성 어떻게 달라지나
이명박 대통령이 지시한 내년도 예산안 전면 재검토의 방점은 일단 '긴축'에 찍힐 전망이다. 대통령이 재정건전성 수호를 강조한데다 최근 금융쇼크 여파로 예상보다 경기가 나빠질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경기 악화는 세수 감소를 의미하고, 이 경우 예산규모 역시 당초 계획보다 보수적으로 책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여권의 복지 포퓰리즘 공세를 감안할 때, 1차적인 긴축 대상은 아무래도 복지 관련 예산이 될 공산이 크다. 기획재정부 고위관계자는 14일 "대통령 말씀 중 '오늘 세운 정책이 10년 후에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정부가 책임감을 갖고 결정해야 한다'는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등록금이나 급식ㆍ의료 지원 등 예산은 1회성이 아니라 한번 정해지면 매년 들어가야 하는 성격이어서 더욱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며 "꼭 필요한 복지예산은 예정대로 책정하되 장기간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예산은 최대한 엄격하게 따져보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기준에 비춰보면 정치권이 내년 예산에 새로 반영하길 요구하는 복지 및 교육예산 상당수가 재검토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정부는 2014년까지 균형재정을 이루겠다는 목표 아래, 내년 예산 증가율을 세입보다 2%가량 낮게 유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로선 당초 전망보다 세입이 늘어날 가능성이 낮다고 볼 때 예산안 역시 기존보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하는 상황이다. 실제 재정부와 예산심의를 진행 중인 각 부처 담당자들은 "예년보다 기본예산이 크게 깎였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반값등록금 담당 부처인 교육과학기술부 안팎에서는 "당정 협의까지 거친 '내년 등록금 15% 인하'를 위한 재정지원 1조5,000억원도 장담하기 어려운 분위기"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 대통령이 재정건전성과 함께 강조한 '실물경제 악영향 최소화' 주문도 고려 요소다. 이를 위해선 수출 둔화와 일자리 감소 등에 대비하는 항목의 예산을 늘려야 하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정부 관계자는 "필요한 사업만큼 재정 지출을 늘리기가 어렵다면 결국 내년 예산안은 어떤 정책을 선택하느냐 하는 우선순위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한국 재정 상황/ 국가채무 적은 편이지만 9년새 3배 이상 증가
최근 미국과 유럽의 재정위기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지면서 우리나라의 재정 상황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14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97.6%)보다 한참 낮은 33.5%에 불과하다. OECD 회원국 중 미국(93.6%)이나 영국(82.4%), 독일(87.0%), 프랑스(94.1%) 등 구미 선진국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100%에 가깝다. 이웃나라 일본의 국가부채는 GDP의 두 배(199.7%)에 달한다. 이처럼 수치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재정건전성은 준수한 편이다.
문제는 국가채무가 늘어나는 속도다. 우리나라 국가채무는 2001년 121조8,000억원에서 지난해 392조8,000억원으로 불과 9년 새 3배 이상 치솟았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2007년 이후 국가채무 증가율은 연평균 10%에 육박한다. 매년 34조원씩 빚이 불어난 셈이다. 올해는 작년보다 42조7,000억원 증가해 435조5,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2014년부터 균형재정을 이뤄 국가빚을 점차 줄여나간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달성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잠재성장률 저하와 저출산ㆍ고령화의 영향으로 갈수록 세입이 감소하는 반면, 복지 지출 등 세출은 크게 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조세부담률 수준과 연금ㆍ의료제도 등이 그대로 유지될 경우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2020년 42.6%, 2030년 61.9%, 2040년 94.3%, 2050년 137.7%로 급증하리라는 게 정부 예상이다.
당장 내년으로 다가온 총선과 대선도 재정건전성에 큰 부담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재원 조달 방안 등을 신중히 따져보지 않은 채 선심성 공약들을 쏟아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지 강화→재정 악화'는 지나친 기우이며, 긴축 재정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재정위기를 복지 탓으로 몰아가는 건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라며 "오히려 복지를 제대로 갖춰야 세입 기반이 넓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경기 침체 때 긴축 재정을 하면 경기가 더 나빠져 결과적으로 재정 여건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며 "지금은 적극적인 재정 정책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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