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종목을 압축 투자해 고수익을 올린 자문형 랩어카운트(맞춤형 자산관리 계좌) 상품이 인기를 끌면서 자문형 랩 시장의 규모는 작년 3월 7,000억원에서 현재 9조원대로 급성장했다. 올 상반기엔 투자자문사들이 '차화정'(자동차ㆍ화학ㆍ정유)에 집중 투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개미들도 합세, 해당 종목 주가는 신기록을 연거푸 갈아치우기도 했다.
미국의 신용등급강등 이후 처음 열린 지난 8일 한국 유가증권시장에서 개인은 7,333억원의 물량을 쏟아내며 지수 폭락을 부추겼다. 외국인(-816억원)보다 9배나 많은 매도 공세였다. 동양종금증권 신남석 리서치센터장은 "자문사들이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개인 계좌에 포함되는)자문형 랩에 넣은 물량을 쏟아내면서 하루 지수 변동폭이 143.75포인트나 됐다"고 지적했다.
지난해부터 시중자금을 빠른 속도로 빨아들이며 증권가 최대 히트상품이 된 자문형 랩이 이번 폭락장에서 치명적 단점을 드러냈다. '몰빵' 투자한 탓에 악재가 닥치면 수익률 방어에 취약할 것이란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높은 수수료가 무색
1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자문형 랩 업계 1위인 브레인투자자문의 한 상품은 1~5일 -12.28%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상반기 SK이노베이션과 에쓰오일, LG화학, 현대차, 현대모비스 등 '차화정'을 적극 매수해 높은 수익률을 자랑했던 이 회사는 최근까지 각 증권사에 배포한 보고서에서 정유와 화학 업종을 관심주로 꼽았었다. 하지만 차화정 업종은 이번 하락장에서 두 자릿수의 마이너스 수익률을 거둬 코스피지수(-8.8%)보다 낙폭이 더 컸다.
비교적 양호한 성적을 거둔 것으로 알려진 창의투자자문도 같은 기간 최대 -8%의 하락률을 보였다. 일반 주식형펀드는 이 기간 하락률이 -6.5%에 불과했다.
자문형 랩은 개인별로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전체적 자산을 적절히 분배해 변동성 큰 시장 환경에 대응한다는 이유로 펀드 상품보다 보통 2배 많은 연 3%대의 수수료를 받아 온 상품. 하지만 그 첫 번째 시험대에서 형편없는 성적을 거두게 됐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이번 폭락 장세는 개별 맞춤 관리 서비스라는 자문형 랩의 성격을 보여주는 시험무대였는데,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로 과연 높은 보수를 받을 만 한지 투자자들의 의구심이 높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열풍이 위기로
사실 이번 위기가 오기 전까지 자문형 랩은 시들해진 펀드 시장을 집어 삼키며 태평성대를 구가해 왔다.
지난해 초 자문형 랩 상품이 출시될 때는 5,000만원 이상인 최저가입금액 등 높은 장벽 탓에 소수 고액 자산가를 중심으로 판매돼 왔지만, 고수익을 낸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일반 고객들까지 열풍에 가세하게 된 것. 판매사인 증권사들은 수익성을 높일 기회라는 듯 랩 상품의 최저가입 금액을 500만~1,000만원으로 낮추고, 펀드와 같은 적립식 상품을 내놓는 등 과열 경쟁에 들어갔다. 급기야 적립식 랩은 판매 하루 만에 금융감독 당국으로부터 판매 금지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이번에 자문형 랩의 수익률이 나락으로 떨어진 건 10~15개 종목을 압축 투자한데다, 핵심 주도주에 '몰빵'한 게 치명타였다. 정병욱 이화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2008년 금융위기로 50개 내외 종목에 분산투자하는 펀드도 반토막이 났다"며 "자문형 랩 상품은 시장이 하락하면 더 큰 손실이 날 수 있는 구조임에도 사전에 이를 방지할 규제가 없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자문형랩
증권사가 고객 성향에 맞게 자산 구성과 운용, 투자자문까지 통합적으로 서비스해주는 랩 어카운트(종합자산관리계좌). 증권사나 은행이 투자자문사에서 종목 선정에 대한 자문을 받아 투자자 돈을 대신 굴려주는, 간접투자와 직접투자 중간의 맞춤형 상품이다. 60~70개 종목을 담고 있는 펀드와 달리 10~20개 종목에 집중 투자하는 게 특징이다.
강아름기자 s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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