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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화려한 맛의 변주… 대한민국 청춘남녀, 보드카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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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화려한 맛의 변주… 대한민국 청춘남녀, 보드카에 빠지다

입력
2011.08.1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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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11년, 대한민국 청춘남녀들의 술잔을 지배하고 있는 술은 뭘까? 유행과 첨단의 선봉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이라면 단연 보드카를 꼽을 것이다. '그 독한 러시아 술을?' 이라고 반문할 이들이 많겠지만, 보드카는 최근 몇 년 새 소리소문 없이 대한민국 젊은 술꾼들의 입맛을 점령했다. 청담동이나 가로수길, 이태원 같은 동네의 힙 플레이스에는 보드카와 토닉워터가 기본으로 차려진 테이블이 심심찮게 눈에 띄고, 특급호텔의 바들도 잇따라 보드카 파티를 열고 있다. 그렇다고 해외 출장지에서 삼삼오오 모여 맥주와 섞어 먹던 '보드카 폭탄주'를 떠올리면 금물. 그럼 어떻게, 왜 보드카를 마신단 말이지?

보드카는 러시아 술? 이젠 다국적 술!

보드카 하면 일단 러시아를 떠올리지만 사실 추운 기후의 북유럽 국가들도 보드카를 고유의 전통주로 여기고 있다. 보드카는 슬라브어로 물을 뜻하는 'voda'에 작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접미사 'k'와 여성형 어미 'a'가 붙어 만들어진 말. 14, 15세기부터 러시아에서 애음되던 술로, 제정 러시아시대 비밀에 부쳐졌던 제조법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만천하에 공개되면서 유럽에까지 전파됐다. 보드카가 세계적인 술로 등극한 건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된 미국으로 제조기술이 건너가면서부터. 밀·보리·호밀 등 곡류를 발효시킨 증류주로 40도에 육박하는 높은 도수와 무색ㆍ무미ㆍ무취의 산뜻한 풍미가 특징이다.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보드카들은 의외로 러시아산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제품들이 많다. 국내 시장점유율 1위의 대중적 보드카인 앱솔루트는 스웨덴 제품이며, 프리미엄급인 그레이 구스와 씨록은 프랑스에서 만든다. 스미노프와 스카이는 미국, 42빌로우는 뉴질랜드, 벨베디어는 폴란드에서 생산된다. 러시아산 보드카로는 2009년 수입되기 시작한 스톨리치나야가 있다.

보드카는 곡류가 기본 재료이지만 지역에 따라 첨가물이 달라 맛도 제각각이다. 러시아산은 감자가 많이 들어가 좀 더 고소한 맛이 나고, 프랑스산은 포도 100%로 만들어져 달콤한 맛이 배어 있다.

나는 시크하다, 고로 보드카를 마신다

보드카 열풍은 실로 거세다. 2009년 7월에서 2010년 6월 사이 전년 대비 15.4% 성장한 국내 보드카 시장은 그 이듬해는 51.1% 매출액이 급증한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만도 전년 대비 40% 이상 판매가 증가했다.

국내 보드카 시장이 이처럼 급격히 성장한 데는 젊은 층에 널리 퍼진, 술과 음료를 다양하게 섞어 마시는 문화가 한몫했다. 주어지는 대로 마시는 술이 아니라 각자 입맛대로 직접 제조해 먹는 술이 개성을 중시하는 세대적 코드에 들어맞은 것.

실제 국내에서 보드카는 소주나 위스키처럼 스트레이트로 마시기보다는 다양한 주스와 탄산음료, 과일 등을 섞어 마시는 게 유행이다. 예전에는 바에 앉아 칵테일 한 잔 주문해 마시는 게 멋져 보였다면, 요즘은 보드카 한 병과 취향에 맞는 과일 주스나 탄산수 등을 주문해 자기만의 술을 만드는 모습이 더욱 트렌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보드카 마니아인 직장인 김진호(40)씨는 "지금 보드카 인기는 예전에 스타벅스 커피가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와 비슷하다"며 "커피를 자기 개성대로 다양하게 즐기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베리에이션(variation) 욕구가 보드카에도 그대로 적용된 것 같다"고 말했다.

가격 경쟁력도 인기 요인 중 하나다. 물 건너온 양주이면서도 위스키나 코냑에 비해 상당히 저렴하다는 게 알뜰하게 분위기를 즐기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에 어필한 것. 앱솔루트는 마트 판매가 기준으로 오리지널이 750㎖ 한 병에 3만2,800원, 그레이구스가 7만원 안팎이다. 다양한 맛과 향을 첨가한 플레이버드 보드카(flavored vodka)는 조금 더 비싸다.

김씨는 "양주 폭탄주가 비싼 돈 들여 다 같이 죽자는 것이었다면 보드카는 훨씬 부담 없는 액수로 같이 즐기자는 술"이라며 "보드카가 술꾼들에게 술의 개념을 새롭게 확장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보드카는 위스키 등 다른 양주에 비해 맛이 가볍고 청량하며 마신 다음날 뒤끝 없이 깨끗하다는 장점도 있다.

무색ㆍ무취로 다양한 변주 가능

보드카는 믹서(술에 섞는 음료나 재료)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맛을 낼 수 있다. 특별한 제조 기술이 없더라도 취향에 따라 토닉워터나 소다수 같은 탄산음료, 오렌지 자몽 크렌베리 등 새콤한 과일주스, 슬라이스한 레몬이나 라임즙 등을 넣으면 다양하게 맛을 변주할 수 있다. 제 냄새가 강하지 않기 때문에 섞어 마실 때 믹서 고유의 맛을 살려주는 덕분이다.

무색, 무향, 무취로 인해 보드카는 유행 이전에도 칵테일 베이스로 애용됐다. 보드카에 오렌지 주스를 곁들이면 스크루드라이버, 사과즙을 넣으면 빅애플, 레모네이드를 섞으면 보드카 콜린스가 된다.

보드카 바를 별도로 운영 중인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피에르 바의 조은영(28) 바텐더는 "보드카의 생명은 온도에 있다"며 반드시 냉장ㆍ냉동 보관해 마실 권을 조언했다. 그는 "실온의 보드카와 차가운 보드카는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도 칵테일 맛이 천차만별"이라며 "스트레이트 샷으로 마실 때도 차가운 보드카가 훨씬 청량한 맛이라 풍미가 좋다"고 말했다.

진정한 보드카 마니아는 스트레이트로

그동안 보드카 마니아들은 섞어 마시기를 즐기는 여성들이 주를 이뤘지만, 최근에는 스트레이트를 즐기는 남성들이 급격히 늘었다. 보드카는 냉동고에 넣으면 알코올 도수가 워낙 높아 얼지 않고 꿀처럼 점성을 지닌 젤 상태로 변한다. 스트레이트로 마실 때는 이 젤 형태를 잔에 따라 마시는데, 상온에서 젤이 녹으면서 시원하고 알싸한 보드카 고유의 풍미를 느끼게 한다. 플레이버드 보드카가 많이 출시된 것도 스트레이트 붐에 일조했다.

조은영 바텐더는 "위스키나 코냑 같은 무거운 술을 즐기던 기업 CEO들도 종종 보드카를 주문해 마셔 깜짝 놀란 적이 있다"며 "너무 정형화된 양주보다 개성에 따라 수제품처럼 즐길 수 있는 보드카가 최근 1, 2년 사이 주류문화의 주류로 자리잡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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