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록적인 폭우와 태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지역을 중심으로 말라리아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말라리아는 주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같은 열대지방을 여행할 때 걸린다고 생각하지만, 국내 ‘토착형’ 말라리아도 있다. 이런 말라리아는 해외여행에서 걸리는 말라리아와 증세가 좀 다르다. 병을 일으키는 원충(原蟲)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같은 병이지만 지역에 따라 원인이나 증상, 진단법, 치료법이 다른 경우는 여럿 있다. 토착형과 외국형 질병의 차이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글로벌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점점 중요해지는 추세다.
■말라리아: 삼일열 원충 vs 열대열 원충
국내 토착형 말라리아는 삼일열, 열대지방에서 주로 발생하는 말라리아는 열대열이라고 불린다. 각각 삼일열과 열대열 말라리아 원충이 원인이다. 삼일열 원충은 열대뿐 아니라 온대와 아열대까지 넓은 지역에 산다. 삼일열 원충에 감염된 모기에 물려 생기는 삼일열 말라리아는 몸이 으슬으슬 춥고 구토가 나며 높은 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전형적인 증상이다. 일단 약을 먹으면 이런 증상이 오래 가지 않아 멈추고, 건강한 사람이라면 더 심해지지 않는다.
동남아나 아프리카 등지에 사는 열대열 원충은 말라리아 원충들 가운데 인체에 가장 치명적이다. 전 세계 말라리아 환자의 약 95%가 바로 이 열대열 말라리아다. 초기에는 삼일열 말라리아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다가 갑자기 나빠지는 게 특징이다. 황달이나 신부전, 혼수 등 회복이 어려운 상태로까지 악화하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증상이 심하지 않은 삼일열 말라리아는 모기장이나 모기퇴치제만으로도 예방이 가능하다. 하지만 열대지역을 방문할 때는 미리 예방약을 먹는 게 좋다. 예전에는 출발하기 1, 2주일 전부터 매일 예방약을 복용해야 해 불편했지만, 요즘엔 하루 이틀 전에만 먹기 시작해도 효과가 있는 약도 나왔다. 일부 약은 특정 지역에서 내성이 생겨 잘 듣지 않기 때문에 여행지에 따라 의사의 처방을 받아 복용해야 한다.
삼일열이나 열대열 말라리아 둘 다 원충을 옮기는 매개체는 암컷 얼룩날개모기다. 이 모기에 물렸을 때 모기 침샘에 있던 말라리아 원충이 사람의 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피를 타고 간으로 침투한 원충은 성장해서 다시 피 속의 적혈구로 침입하고, 이때 말라리아 증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유방암: 치밀유방 vs 지방질유방
유방암은 5대 암 가운데 오진율이 가장 높다고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이 꼽는 이유는 한국 여성 특유의 유방 조직 때문이다. 유방은 크게 지방조직과 유선(乳腺)조직으로 이뤄져 있다. 여성이 젊을 때는 유선조직이 많아 치밀하고 단단한 섬유질유방(고밀도유방, 치밀유방)이었다가 폐경기가 지나면 유선조직이 줄고 지방조직이 늘면서 지방질유방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치밀유방은 지방질유방보다 조기에 암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유선조직이 많으면 플라스틱 판으로 유방을 눌러 찍는 X선 촬영에서 사진이 하얗게 나와 암 덩어리가 있어도 가려지기 때문이다. 다른 진단법인 유방 초음파로는 크기가 매우 작은 암이나 범위가 넓지만 정도가 미세한 암은 역시 발견되기 어렵다.
우리나라 여성의 연령대별 치밀유방 비율은 30~34세가 88.1%, 35~39세 91.1%, 40~44세 78.3%, 45~49세 61.1%, 50~54세 30.1%, 55~59세 21.1%, 60~64세 7.0%다. 서양에 비해 치밀유방을 가진 여성이 두드러지게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서양 여성의 유방암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기 진단이 쉽지 않다는 얘기다.
치밀유방인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4, 5배 높다는 연구결과도 최근 나왔다. 치밀유방이 유방암 발병률을 정말 높이는지, 높인다면 왜 그런지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일부 학자들 사이에선 지방질유방보다 유방암 세포가 증식하는 데 치밀유방이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때문에 국내에선 유방암 진단에 유방자기공명영상(MRI) 이용이 늘고 있는 추세다. 약 30분 동안 엎드린 자세로 촬영하며, 검사 도중 필요에 따라 조영제를 주사하기도 한다. 한부경 삼성서울병원 유방영상의학과 교수는 “가족 중에 유방암이나 난소암에 걸렸던 사람이 있거나 유방암 유전자 양성인 고위험군에 속하는 여성은 만 30세부터 40세까지는 MRI와 X선 검사를 1년씩 번갈아 가며 받아보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유방암 4기의 5년 생존율은 28%, 3기는 59%, 2기는 89%, 0기와 1기는 99%에 달한다. 빨리 발견할수록 생존율이 크게 높아지는 데다 유방 전체를 들어내지 않고 일부분만 떼어내 치료할 수 있다.
■고지혈증: 중성지방 vs 콜레스테롤
피 속에 비정상적으로 많아진 지질 성분이 혈관 벽에 쌓여 염증을 일으객?고지혈증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환자가 늘고 있는 만성질환이다. 한국과 외국 고지혈증 환자의 가장 큰 차이는 쌓이는 지질 성분의 종류다.
보통 고지혈증 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떠올리는 게 바로 콜레스테롤이다. 콜레스테롤은 동물조직에 주로 존재하는 지질 성분이다. 고기를 많이 먹는 서양인들의 고지혈증은 주로 콜레스테롤이 혈관에 쌓이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반면 한국인 고지혈증 환자의 혈관에 쌓여 있는 지질성분은 콜레스테롤보다는 중성지방이 많다. 중성지방은 몸에 들어온 탄수화물이 분해될 때 생기는 부산물이다. 쌀과 떡, 국수 등 곡물을 많이 먹는 우리나라 특유의 식단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고지혈증 치료를 위한 식단도 그래서 한국인과 서양인이 다르다. 한국인은 단순히 육류 섭취만 줄여서 될 일이 아니란 소리다. 탄수화물 섭취부터 줄이는 게 오히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신증후군출혈열: 한탄바이러스 vs 푸우말라바이러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행성출혈열 환자가 발견됐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엔 3,000명이 넘는 유엔(UN)군이 이 병에 걸리는 바람에 한국형출혈열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국제 의학계에서 부르는 정확한 이름은 신증후군출혈열이다.
건조하고 야외 활동이 많아지는 봄이나 가을 주로 발생하는 한국형 신증후군출혈열의 초기 증세는 독감과 비슷하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식욕이 떨어지면서 열이 오르고 머리와 배, 허리가 심하게 아프다가 얼굴이나 입 속, 가슴 등에 출혈반점이 생긴다. 그러고 나면 신장이 망가지거나 혼수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사망률은 5~7%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발병하는 신증후군출혈열은 신장이 아니라 폐를 손상시킨다. 증상이 한국형보다 심하고 사망률도 높다.
한국형과 외국형 신증후군출혈열의 이같은 차이는 원인 바이러스가 달라서다. 국내에서 발견된 건 한탄바이러스와 서울바이러스. 유럽 신증후군출혈열은 푸우말라바이러스, 미국은 무에르토밸리바이러스, 프로스펙트힐바이러스 등이 일으킨다. 이들 모두 한타바이러스속에 속한다.
■당뇨병: 베타세포 부족 vs 인슐린 기능 이상
국내에 환자가 가장 많은 만성질환으로 당뇨병이 꼽힌다. 덕분에 한국인과 서양인의 당뇨병이 다르다는 사실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인의 당뇨병은 ‘마른 당뇨병’, 서양인의 당뇨병은 ‘비만 당뇨병’이라는 것이다.
당 성분이 우리 몸에 영양분으로 흡수되려면 세포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를 도와주는 물질이 인슐린이다. 인슐린 분비가 부족한 경우 또는 분비됐어도 제대로 기능을 못 하는 경우 당이 피 속에 그대로 쌓여 고혈당이 된다. 이런 당이 소변으로 배출되는 게 바로 당뇨병이다.
인슐린은 췌장에 있는 베타세포가 만들어낸다. 한국인은 똑같은 췌장 부피에 존재하는 베타세포 수가 서양인보다 좀 적다. 김성래 부천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당뇨병으로 넘어갈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의미”라며 “실제로 한국인 당뇨병 환자에선 인슐린 분비 부족이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반면 서양인의 당뇨병은 이미 분비된 인슐린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로는 활동량 부족이나 비만, 스트레스 등이 꼽힌다. 김 교수는 “한국인 당뇨병 환자는 식단 조절에, 서양인 환자는 운동에 좀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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