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젓한 달빛 사이로… 천 년의 잠을 깬 왕들이 말을 건다
팔월의 여행은 사나운 볕을 피해 그늘을 찾는 일이 되기 십상이다. 제아무리 장엄한 경관도 에스프레소가 얼음 덩어리를 휘감으며 흑갈색 와류를 일으키는 아이스커피잔 속의 풍경만 못하게 느껴진다. 이럴 땐 차라리, 밤길을 나서는 것이 방법. 지난 4일 여름의 한복판 경주로 밤여행을 다녀왔다. 낮 동안 달궈진 감색 기와 처마에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음력 닷새의 달이 걸려 있었다.
오후 7시 반, 박모(薄暮)에 계림의 초록이 서서히 채도를 잃어간다. 왕릉과 숲, 고건축물을 밝히는 조명에 전원이 들어오는 시간이다. 그리고 육칠십대의 신혼여행, 사오십대의 수학여행 기억 속의 빛바랜 경주와는 사뭇 다른 밤의 경주가 피어난다. 천년을 말없이 누워있는 왕들의 무덤과 서둘러 꽃을 틔운 코스모스가 어울려 루미나리에를 이루는 휘황함이, 팔월 경주의 밤이 지닌 얼굴이다.
경주 밤 산책에는 출발점과 도착점이 따로 없다. 23기의 고분이 모여 있는 대릉원과 첨성대, 계림, 월성, 임해전지(안압지) 등 야간 조명이 들어오는 유적이 모두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내물왕릉에서 국립경주박물관에 이르는 이 길은 고도 서라벌의 다운타운이었다. 실크로드의 동단(東端)이었던 서라벌의 영화는 서력 935년 막을 내렸지만, 왁자한 여행객에 섞여 걸으면 그 시절의 은성함에 취하는 듯하다.
고즈넉한 경주의 일몰을 느끼고 싶다면, 특히 사진으로 그 빛의 사멸을 담아보고 싶다면 대릉원에서 산책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언어로 그 오묘한 기울기를 포착할 수 없는 왕릉군의 곡선 사이로, 막 숨을 다한 하루 빛의 잔상이 마젠타의 인공 조명과 섞여 환영인 듯한 색채의 풍성함을 자아낸다. 더구나 이날 저녁처럼 초승의 달이 금속성 흰 고리를 서쪽 하늘에 찍어놓는 날은 눈(目)의 잔칫날이다.
대릉원에서 임해전지로 가는 밤나들이객들은 대개 첨성대에 바짝 붙은 큰 길을 따라 걷는다. 가로등 불빛에 길 찾기가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림과 월성 가까이로 난 호젓한 산책로가 더 운치 있다. 다소 어둑하지만 멀리 은빛 조명에 싸여 환한 녹색으로 빛나는 숲과 왕릉을 바라보며 걸으면 낮의 더위가 달아난다. 13세기 고려 승려 일연이 에 기록해둔 알과 궤짝의 탄강(誕降) 설화의 배경이기도 하다.
시내 곳곳에 산재한 관광표지판의 화살표가 모이는 소실점 같은 곳에 경주 야경의 백미로 꼽히는 임해전지가 있다. 에는 문무왕 14년(674) 왕궁의 별궁으로 동궁 안에 임해전이 건립됐다고 기록돼 있다. 임해전지(址)는 그 터고 안압지(池)는 동궁의 못이다. 오늘날 보는 전각과 못은 1970년대 발굴ㆍ복원한 것이다. 복원품인 만큼 문화재적 가치는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수면을 기준으로 진상과 그림자를 데칼코마니처럼 펼치는 야경만큼은 압권이다. 금빛의 전각뿐 아니라 세 개의 섬과 솔숲이 뿜어내는 푸른 빛, 산책객이 들고 있는 백등의 은은한 우윳빛도 머릿속에 뚜렷한 잔영을 남긴다.
경주의 달밤을 즐기려면
혼자서 걷는 길도 좋지만 달빛 기행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보다 실속 있게 경주의 밤을 즐길 수 있다. 신라문화원은 매월 둘째 주 토요일 '달빛 신라역사기행'을 진행한다. 낮에는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을 통해 유적을 답사하고, 해 진 뒤엔 달빛 아래서 국악 공연을 관람하거나 신라 유적에서 탑돌이를 체험할 수 있다. 참가비 어른 2만원, 어린이 7,000원(저녁식사, 교통비 포함). 문의 (054)774-1950. 경주남산연구소도 매달 두 번째 토요일 밤 '경주남산달빛기행'을 무료로 진행한다. 노천 박물관으로 불리는 신라 불교문화의 보고를 달빛 아래서 만나볼 수 있다. 매회 선착순으로 50~80명 접수를 받는다. 사전예약 필수 (054)771-7142. 야간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하면 짧게나마 손쉽게 경주 야경을 둘러볼 수 있다. 매일 오후 6시 30분 경주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가 서출지, 안압지, 첨성대, 김유신묘 등을 돌아 10시 보문단지에 도착한다. 문의 경주시티투어천마관광 (054)743-6001.
경주=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제19차 유엔세계관광기구 총회 10월 8일 경주 개막
세계 154개국 관광 관련 장관과 공공기관장들이 모이는 '제19차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 총회'가 10월 8일부터 14일까지 경주에서 열린다. UNWTO 총회는 관광 관련 기구, 학자, 업체 관계자들이 모이는 자리로 2년에 한 번씩 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총회에 참석하는 1,500여명의 각국 전문가들에게 개최지 경주를 지속 가능한 관광의 모델로 제시할 계획이다.
경주시는 이번 총회를 경주 관광 활성화의 계기로 삼겠다는 복안이다. 해외여행 대중화와 맞물려 경주 관광은 1990년 이후 침체기를 이어왔다. 그러나 2010년 KTX가 신경주역에 정차하기 시작하고 각종 프로그램이 개발되면서 관광 경주의 부활 조짐이 보이고 있다. 2000년 이후 600만명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던 경주 방문객 숫자는 지난해 910만명으로 증가했다.
경주시는 '역사ㆍ추억ㆍ녹색ㆍ전통문화' 네 가지를 중심축 삼아 경주를 '보는 관광'에서 '체험 여행'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키는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추억의 경주 수학(신혼) 여행, 선덕여왕의 길, 경주 농촌 체험마을, 다도예절 체험학교, 경주국립공원 생태관광 등이 그것이다. 시는 UNWTO 총회 참석자들에게 이 프로그램들을 소개해 세계에 알릴 계획이다.
문화부는 페이스북(http://www.facebook.com/unwto2011), 트위터(http://twtkr.olleh.com/unwto2011), 블로그(http://blog.naver.com/unwto2011)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UNWTO 총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아이디어를 받는다. 총회 공식 홈페이지(http://GA2011.kr)에서도 제안을 할 수 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 경주 시내에서 고택체험
경주에서 고택 체험은 강동면 양동마을에 한정됐었다. 체험의 만족도는 높지만 시내에서 북으로 꽤 떨어져 있는 것이 단점이었다. 신라문화원(원장 진병길)은 2009년부터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고택 5곳을 개수해 숙박이 가능한 시설로 이용하고 있다. 모두 문화재로 지정된 곳으로 소유자인 문중의 허락을 받아 한옥 체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진 원장은 "집은 사람이 거주할 때 제대로 보존된다"며 "문화재 보호와 체험관광이 결합하는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물 제413호인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은거할 때 지내던 곳으로 수려한 자연 경관 속에 위치해 있다. 행랑채, 별채, 양진채 등 각 당우를 숙박시설로 제공하고 전통 유교 예절 교육, 제사 체험 등도 가능하다. 종손댁이 차려주는 음식도 맛볼 수 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85호인 종오정은 영조 때 학자인 최치덕(1699~1770)의 사당과 후학들의 공부 공간으로 지난 6월 개방됐다. 집 앞 연못을 가득 메운 연꽃 향기가 일품이다.
선조 25년(1592) 부산 첨사로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김호 장군이 지은 정자인 월암재, 조선 명종 때 문신 이정(1512~1571)이 세운 서악서원, 중종 1년(1545) 건립된 도봉서당도 깔끔하게 보수를 끝내고 한옥에서 하룻밤을 지내길 원하는 관광객을 맞고 있다. 이용금액은 객실에 따라 3만원에서 20만원까지 다양하다. 홈페이지(www.gjgotaek.kr)를 통해 예약할 수 있다. 문의 (054)774-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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