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 헤게모니 예전과 달라"
"깃발만 꽂으면 당선은 옛말이 될 것이다." "호남에서의 민주당 헤게모니도 예전과는 다를 것이다."
내년 4월 총선을 8개월 앞두고 찾아간 호남 지역에서 만난 유권자들은 한결같이 '호남=민주당 텃밭'공식이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이를 통해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처음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호남 민심에 변화 기류가 나타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경기가 좋을 때야 밉든 곱든 민주당이제. 지금은 경기도 어렵고 먹고 살기 힘든 판에 민주당 깃발만 보고 찍을 수가 있다요."
호남 지역 주민들에게 정치에 대해 물으니 일단 "먹고 살기 힘들어 관심 없다"는 대답이 먼저 나왔다. 살림살이가 어려운데 여당이든 야당이든 뭐가 대수냐는 투였다. 경제가 어려워진 책임을 물으니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이 월등히 많았지만 호남의 '여당'인 민주당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광주 광천터미널에서 만난 택시기사 박모(55)씨는 "호남이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지만 돌아온 것은 되레 역차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례로 광주의 상징이었던 전남도청을 주민들의 반대에도 전남 무안으로 이전시키는 바람에 금남로와 충장로 일대의 상권이 많이 어려워졌다"고 주장했다. 광주 양동시장에서 철물점을 운영하는 나모(65)씨는 "도청뿐 아니라 무안 국제공항도 DJ의 고향 쪽으로 이전한 게 아니냐"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광주와 전남보다 상대적으로 더 낙후된 전북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전주 중앙동에서 만난 자영업자 김모(60)씨도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전북에선 DJ 정부 때 새만금 공사가 중지된 적도 있었고, 동계 올림픽 국내 유치 경쟁에서도 평창이 실패할 경우 무주에 양보하기로 한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전직 공무원인 정모(70)씨는 "한때 전주는 전국 6대 도시로 꼽혔지만 지금은 20대 도시 안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며 "김대중 대통령을 당선시킴으로써 정치적 한(恨)을 풀었을지는 몰라도 그로 인한 경제적 혜택은 별로 없다"고 씁쓸해 했다.
전주에서 만난 학원강사 정모(37)씨는 "민주당이 DJ를 앞세워 호남에서 표를 달라고 하는 시절은 끝났다"고 단언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호남권의 한나라당 광역단체장 후보들이 13~18%의 득표율을 기록해 민주당 헤게모니에 균열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반면 'DJ 정신'을 보다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은행원 조모(42)씨는 "말로만 DJ의 정신을 이어 받은 민주당 후보라고 해서 찍어줄 유권자가 어디 있느냐"며 "하지만 DJ가 40년 전 내세웠던 '40대 기수론'이 내년 총선에서 '세대교체' 요구로 이어질 수 있다면 DJ 정신이 호남에 주는 함의는 적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광주∙전주=김회경기자 hermes@hk.co.kr
■ "포스트 DJ 세대교체 필요… 與든 野든 힘있는 사람 뽑을 것"
"여든 야든 힘 있는 국회의원 선출해야"
호남 지역 주민들은 내년 4월 총선에서 "현역 의원이 상당수 교체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중에는 "지역 발전을 위해서는 민주당이든 한나라당이든 정당을 따지지 말고 힘 있는 국회의원을 배출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민주당에 대한 호남 주민들의 피로감이 쌓였다는 방증이었다.
광주 양동시장에서 만난 윤모(54)씨는 "한나라당 비례대표 이정현 의원이 내년 총선에서 광주 서구을에 출마한다는 뉴스를 봤다"며 "이 의원이 한나라당 소속이긴 해도 국회에서 예결위원을 하면서 광주에 많은 예산을 따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호감을 보였다. 택시기사 김모(58)씨도 "민주당 의원들이 정부에서 지역 예산을 따올 때 결국 친한 여당 의원들을 통해 부탁하는 것 아니냐"며 "호남에서도 전략적으로 여당 의원들을 당선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 이모(45)씨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광주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정용화씨도 서구갑 출마를 준비한다고 들었다"며 "실질적으로 호남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기는 어렵겠지만 예전에 비해선 선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순천에서 만난 전직 공무원 김모(75)씨는 "지난 4ㆍ27 재보선에서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이 당선되었지만 주민 입장에서는 군소정당 소속 의원들이 과연 중앙정치에서 목소리를 제대로 내거나 지역 예산을 가져올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총선 때 민주당이 또다시 순천 공천권을 다른 야당에 양보한다면 유권자의 투표권을 침해하는 게 아니냐"고 항변했다.
순천 버스터미널 앞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강모(54)씨는 "순천은 무소속 후보 노관규씨를 시장으로 당선시켰듯이 민주당 후보라고 해서 다 찍어주지 않았다"며 "민주당이 제대로 된 후보를 내지 않으면 능력 있는 무소속 후보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총선 때 힘 없는 다선 의원 물갈이 해야"
전주 중앙시장에서 만난 상인 강모(58)씨는 "호남에서 별다른 활동도 없이 오랫동안 의원직을 유지한 사람들은 내년 총선 때 갈아야 한다"며 "호남 의원들은 공천 및 선거 기간 6개월 동안 바짝 장사해서 나머지 3년 6개월 동안 편히 지내는 사람들 아니냐"고 목청을 높였다. 택시기사 공모(45)씨는 "전북에는 3선 이상 의원만 다섯명이나 되는데도 정부가 전주에 주기로 한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경남 진주에 빼앗길 때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했다"며 "그럴 바에야 지역발전을 위해 열심히 뛸 수 있는 참신한 신인들을 뽑아주는 편이 더 낫다"고 말했다.
"야권 후보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대선후보를 밀 것"
호남 주민들은 내년 대선 전망을 묻는 질문에는 "반드시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광주에서 만난 회사원 장모(46)씨는 "DJ 정부, 노무현 정부에 대한 아쉬움과 불만이 크지만 이명박 정부가 보여준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와 4대강 사업과 같은 밀어붙이기식 사업 등이 과거 민주정부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전주에서 만난 교사 박모(57)씨도 "민주당에 대한 실망보다 경제를 살리라고 뽑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실망이 더 클 것"이라며 "민주당도 일대일 구도만 만들면 한나라당과 해 볼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호남 주민들은 정권교체의 중심 인물로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을까. 이들은 "야권후보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인물을 전폭적으로 밀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순천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추모(48)씨는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 광주에서 '노무현 바람'을 일으킨 것처럼 결국 호남이 선택하는 인물이 야권을 대표하는 주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호남은 DJ를 당선시킨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호남 인물을 고집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인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지난 10개월 동안 제1야당 대표로서 리더십을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다" 등의 유보적 평가가 많았다. '문재인 대망론'에 대해서도 물음표가 이어졌다. 40대 이하에서는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 때문에 문재인 변호사에 거는 기대가 상대적으로 큰 것 같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그늘을 뛰어넘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의견이 많았다. 50대 이상 남성과 주부들은 "언론을 통해 접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며 "현역 정치인들과의 경쟁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전망했다.
한편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평가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비판론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다. 전주에서 만?한 시민은 "과거 참여정부 때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할 때 정동영 유시민 등 차기 유력 주자들도 함께 도마에 올랐지만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마저 박 전 대표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에 대한 호의가 대선 표심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대다수 호남 주민들은 "지역 일꾼을 뽑는 총선과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을 뽑는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다"며 "일대일 구도만 형성되면 결국 야권 후보에 표를 모아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조했다.
광주ㆍ전주ㆍ순천=김회경기자 hermes@hk.co.kr
■ 전문가 견해/ "의석수와 민심 이미 괴리된 상태…민주당, 안이하면 호남 기반 붕괴"
내년 총선에서의 호남 정치 지형에 대해 전문가들은 민주당과 호남 유권자들의 괴리감 확대, '포스트 DJ(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후) 시대'의 호남 차세대 지도자에 대한 갈망 등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정치학박사)은 9일 "현재 호남 지역에서는 민주당이 의석을 독점하고는 있지만 그에 반해 민주당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기대가 그리 크지 않아 의석과 민심이 괴리된 상태에 있다"고 진단했다. 이 경우 정치세력이 변화를 통해 유권자의 요구와 열망에 부응하든지 아니면 유권자들이 또 다른 대안세력을 선택해야 한다. 김 원장은 "아직은 민주당이 아닌 선택지가 마땅치 않아 민주당 절대 다수의 구도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민주당이 안이하게 가다가는 무소속이 상당수 당선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이어 "그렇게 되면 민주당이 호남색 탈피를 위해 애쓰는 상황까지 더해 민주당의 호남 지지 기반이 급격하게 붕괴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인재 영입과 이른바 '호남 물갈이'가 주목된다. 정치평론가인 고성국 정치학박사는 "대선 전초전 성격의 총선인 탓에 민주당이 호남에서 이기기는 하겠지만 물갈이를 하고 이기느냐, 안 하고 이기느냐는 다른 지역에서의 승부와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호남 정치에서 일종의 리더십 공백이 유지되고 있는 점도 향후 호남 정치 지형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김 원장은 "정치권에 친노세력도 있고 YS(김영삼 전 대통령)키드도 있는데, 호남 유권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호남을 대표하려는 DJ 후속세력이 없다"며 "이 같은 상황이어서 호남 지역 유권자들은 현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을 비판하면서도 민주당을 통해 뭔가를 이루려는 동기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고 박사도 "충청도의 안희정, 강원도의 이광재, 경상도의 김두관 같은 포스트 DJ 인물이 왜 호남에는 없느냐는 얘기가 많다"며 "내년 총선에 호남에서 차세대 리더들이 얼마나 나올 수 있을지도 관심사"라고 전망했다.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 민주당 텃밭 고전사
지난해 10ㆍ27 광주 서구청장 재선거는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의 민심이 예사롭지 않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 '사건'이었다. 무소속 김종식 후보가 38.2%의 득표율로 국민참여당과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당 김선옥 후보는 23.8%의 득표율로 국민참여당 서대석 후보(35.0%)에게도 크게 밀리는 3위를 기록했다. 민주당은 손학규 대표 등 지도부를 총출동시켜 지원 유세를 펼쳤음에도 승기를 잡지 못했다.
호남 민심이 무조건 민주당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는 점은 최근 지방선거와 총선에서도 확인됐다. 민주당이 전국적으로 선전했던 지난해 6ㆍ2 지방선거 당시 호남권에서 총 9명의 무소속 기초단체장이 당선됐다. 광주ㆍ전남 27개 기초단체장 선거 가운데 광주 서구, 여수, 순천, 광양, 곡성, 화순, 강진, 신안 등 8개 지역에서 무소속 후보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전북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김제시장을 차지했다.
지난해 7ㆍ28 광주 남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도 민주당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민주당의 장병완 후보(55.9%)가 신승을 거두긴 했지만 민주당을 뺀 야4당 단일후보로 나선 민주노동당 오병윤 후보(44.1%)에게 턱밑까지 추격을 허용했다.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출마자 6명이 호남권에서 당선됐다. 광주 남구(강운태) 목포(박지원) 해남ㆍ완도ㆍ진도(김영록) 무안ㆍ신안(이윤석) 전주 완산갑(이무영) 정읍(유성엽) 등에서 민주당 대신 무소속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이 같은 호남의 표심은 '제대로 된 후보를 내세우지 않고 민주당 깃발만 꽂을 경우에는 애정을 보내지 않겠다'는 경고를 보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한 뒤 무소속 후보로 나선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천 잡음이 민주당에서 호남 민심이 떠나는 것을 재촉한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특히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등 다른 야당들이 비(非)민주당 단일전선을 형성할 경우 호남에서도 상당한 파괴력을 가질 것으로 전망된다.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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