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가 불분명한 '제2의 리먼 사태 유령'이 세계 금융시장을 초토화시키고 있다. 열흘 전(7월31일ㆍ현지시간) 미국이 극적으로 부채상한 증액 협상을 이끌어낸 직후만 해도 글로벌 시장은 "불확실성이 걷히게 됐다"며 주가 상승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숨돌릴 틈도 없이 불거진 미국 더블딥(이중침체) 우려와 신용등급 강등 조치(5일)에 시장은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모습이다. 각국 정부는 "실체가 없고 과장된 공포"라고 일축하면서 국제공조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패닉(공황상태)에 빠진 시장은 귀를 닫아 버렸다.
환호에서 패닉으로
미국이 재정지출삭감과 부채상한 증액협상을 타결한 직후 열린 1일 아시아 증시는 그간의 부진을 씻고 일제히 상승했다. 코스피지수가 1.83% 오른 것을 비롯해 일본(닛케이)과 중국(상하이종합), 홍콩(항셍), 대만(가권) 지수 모두 플러스를 기록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부터 외신을 중심으로 "미 정부의 긴축정책으로 실업률은 더 높아지고 경제성장은 둔화할 것"이라며 더블딥 우려가 본격 제기됐다. 여기에 5일 미국의 신용등급강등이 쐐기를 박으면서 세계 증시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공포로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이 기간(2~9일) 코스피지수와 코스닥지수는 최악의 기록들을 쏟아내면서 각각 -16.31%, -20.41% 폭락했다. 같은 기간 사태의 진앙지인 미국(다우)은 -8.90% 급락했고, 아시아와 유럽 주요 증시도 10%대를 전후한 하락률을 기록했다.
반면 국채가격에 영향을 주는 신용등급이 강등됐음에도 미국 국채는 여전히 인기다. 주식시장만 보면 미국이 금세라도 무너질 것 같은 반응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은 절대 망하지 않을 거다"는 확신이 자리잡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 지금의 공포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의미다.
'위기설(說)'이 확대 재생산
3년 전 금융시장 붕괴가 '미국 투자은행의 줄도산'이라는 실체를 본 뒤에야 벌어진 것이라면 현재는 '위험설(設)'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시장을 진짜 위기상황으로 몰아 가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투자증권 송재학 리서치센터장은 "달러 제국의 신용등급 강등이란 사상 초유의 사태와 장기 과제인 유럽의 재정위기가 겹치면서 세계 경제가 공멸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감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과 유럽의 재정 문제가 단기간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글로벌 공조를 통해 대응할 수 있음에도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 지레 겁을 먹고 '묻지마 매도'를 하고 있다는 것. 즉, 위험설(設)로 인한 동요가 주가 폭락과 자금 유출 등 실체 있는 위험을 만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공포 심리에는 리먼 사태의 학습효과가 반영됐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등 소수의 닥터둠(비관론자)들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미국 정부와 다수의 경제 전문가들은 이를 강하게 반박했다. 투자자들도 희망적 전망에 베팅했지만, 닥터둠의 예언대로 세계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루비니 교수는 이번에도 "세계 경제가 더블딥에 빠지는 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한 업계 관계자는 "3년 전과 달리 우리나라는 경상수지가 안정돼 있고 외환보유고도 많아 안정적이지만, 이번에는 투자자들이 닥터둠의 예언에 즉각 반응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강아름기자 s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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