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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24> 군사정권이 내민 '당근'과 '채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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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24> 군사정권이 내민 '당근'과 '채찍'

입력
2011.08.0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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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 감독 등 때문에 홍콩에서 법석을 떨고 난 후 어느 날 홍콩 총영사한테서 "한국에서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함께 조찬을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고 연락이 왔다.

조찬에서 만난 김성진 장관은 "한국에 와서 감독을 할 생각은 없습니까? 여기서 다른 나라를 위해서 감독 하시는 것보다 한국에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제안을 했다. 여느 때와 달리 마음이 흔들렸다. 오랜 외국 생활에 서서히 지쳐갈 무렵이었다. 시스템도 없고 영세하며 살벌한 군사정권하에 있는 애처로운 조국, 그러나 사람 사는 정이 있는 곳, 한국이 그리웠다.

하지만 군사정권하에서 영화 만드는 일은 더욱 날 지치게 할 것이라는 것도 두려워서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혜를 받으라는 '당근'의 유혹이 있었지만 창작의 자유가 검열과 규율이라는 '채찍'하에 잘려나갈 각오를 해야 했다. 김 장관의 제안이 의미하는 '당근'과 '채찍'을 양 손에 놓고 견주느라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모순되는 유혹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당시 군사정권하 영화법에 의해 영화사 설립은 허가제였다. "아무나 영화를 만들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묶어 놓으면 영화하고 싶은 사람이 할 수 없으니 간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합니까?"했더니 김 장관은 "알았습니다. 제가 가서 한번 방법을 연구해 보겠습니다"하고 돌아갔다.

한두 달 지나서 전화가 왔다. "허가를 내주기로 했으니까 들어오셔서 영화사 허가를 내십시오." 김 장관이 앞에 서고 정부의 최고 실세가 뒤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물리치기는 쉽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5ㆍ16군사혁명 때 군사혁명 홍보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했던 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씨나 김종필씨 등 몇 사람과의 인연도 작용했다. 난 혁명 홍보 영화에는 불참했지만 신상옥 감독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전폭적인 군사정권의 후광을 입어 파죽지세였다. 이북으로 가게 된 여러 사건 전까지는 말이다.

어쨌든 그 후 홍콩 시절에도 군사정권의 실세들은 한국에서 영화제작을 하면 제작비를 포함한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꾸준히 해왔었다. 그러나 군사정권하에서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마음이 어느덧 고향으로 향했고 때마침 김 장관의 제안도 있어서 홍콩 생활을 정리 하고 영화사 허가를 내기 위해 그리운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영화사 허가 규정은 스튜디오 같은 200여 평(약 60㎡)의 촬영소를 한 개 소유해야 했고, 촬영기가 2,3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인천에 창고를 하나 구입해서 촬영소로 시설을 갖췄고 촬영기는 일본과 홍콩에서 각각 한 개씩 구입했다. 또 영화발전기금 5,000만원을 영화진흥공사에 기탁금으로 내는 규정이 있어서 당시로써는 꽤 거금이었던 기탁금을 내고 드디어 화풍흥업이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홍콩에서 해왔던 대로 영화사 시스템을 갖춰서 '기획팀부터 제작부나 대ㆍ소도구 팀까지 전 스태프가 모여 항상 제작회의를 완벽하게 하고 촬영을 한다'는 포부와 '좀 더 발전적인 시스템으로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의욕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전문적인 인원구성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무렵 대학에 영화과가 생겨 영화를 전공한 학생을 영입 할 수 있었지만 5년 이상은 현장교육을 시켜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홍콩 식으로 영화 전공 출신들 다섯 명을 기획부에서 훈련시켰다. 작품선정부터 연출까지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고자 했지만 그들에게는 현장경험이 없으니 내가 생각한 대로 따라오지 못했다.

더구나 나한테 가장 치명적인 어려움은 1년에 세 작품이라는 의무편수를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화라는 것이 1년이든 2년이든 장고 끝에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인데 기계처럼 1년에 세 편을 만들어야 한다니 정신적 부담이 컸다.

세 편의 의무편수를 채운 다음 그 영화 중 우수영화심사에서 합격한 영화가 있으면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규정이 있었다. 1970년에 단행된 영화법 3차 개정에 의한 것이었다.

몇 차례 영화법 개악을 통해 영화자본 독점화가 가속되었다. 특혜를 받은 소수의 독점 영화 제작자들은 문화 창달의 일익을 담당하기보다는 한국영화 제작을 외화수입쿼터를 배정받기 위한 요식행위로 인식했고 소위 '깡통영화'라고도 하는, 개봉하지 않고 오직 수입쿼터를 배당 받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저급 영화들을 양산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새삼스럽게 한국영화계에 뛰어든다는 것이 다소 위험하긴 했어도 김 장관이 "하여튼 최대한 뒷받침을 해 줄 테니까 고생이 되더라도 해봐라"하니 부딪혀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군사정권하에서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는 것이 역시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앙정보부나 보안사령부에서 수시로 관여를 했고 시나리오는 사전 심의를 받아야 했으며 영화가 완성되면 다시 검열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정신적인 압박은 다른 영화감독들도 힘들게 했겠지만 특히 홍콩에서 비교적 자유스럽게 감독을 하고 제작 활동을 했던 내게는 큰 고역이었다.

그러던 중 우수영화 쿼터 지원을 받기로 하고 '학을 그리는 여인'(1979)을 만들었는데, 기존 16개 회사가 농간을 부려 신규업자에게 돌아갈 우수영화 쿼터를 빼돌리고 말았다. 신규업자가 우리 회사 한 업체라면 어찌해보겠는데 우리 회사를 포함한 다섯 개의 회사였으니 어찌 해 볼 수도 없었다.

16개 회사가 적이 돼버렸으니 앞날이 암담했다. '그래도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어떻게든지 해보자' 했지만 그 사람들이 눈에 보이게 밀어줄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난 신규업자에게 주기로 약속 된 쿼터를 재요구했고 위에서는 내게만 줄 수 없어 다섯 개 회사에게 모두 쿼터를 주게 되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나 나름대로 화풍흥업을 탄탄하게 끌고 나갔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를 당하고 전두환 정권으로 권력이 이양되면서 그나마 내게 주어지던 모든 혜택도 사라지고 말았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외화심의와 국산영화심의를 통해 휘두른 이영희 공연윤리위원장의 전횡은 나를 포함한 한국영화 제작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영희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전두환과 전경환을 배경으로 일부 악덕업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수수했다. 당시 통상적인 뇌물은 500만원 선이었는데 이영희와 거래하는 뇌물은 2,000여만 원이었으니 그 검은 결탁의 일각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때 자행되는 심의의 가위질은 그 뇌물의 액수만큼 대단했다. 한 두 커트 잘려나가는 수준이 아니라 필름 1,000자~2,000자(10~20분 분량)씩 잘려나갔다. 영화 제작자들이 받은 이런저런 박해는 나 또한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결국 훈련시키던 스태프들은 회사가 어려워지니 KBS와 MBC등으로 다 가버렸고, 시스템과 자본 등이 벽에 부딪히며 외적으로 곤경에 처하고 보니 결국 건강까지 문제가 되었다. 아내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해 힘들어 하는 것이 역력했다. 어느 날 아내가 "한국에서 이렇게 당신이 고생을 하느니 미국에 가서 편하게 지내는 게 좋지 않으냐? 당신 할 만큼 일을 했고 영화를 위해서도 그만큼 기여 했으니 미국으로 가자" 며 미국행을 권했다.

어쩔 수 없이 199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다. 화풍흥업을 설립한 것이 78년이니 만 18년간의 한국생활을 접고 다시 외국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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