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장 하루벌이 막막" 300만명이 4년 이상 보험료 못 내
여기 저소득씨와 고소득씨 두 사람이 있다. 저씨의 한달 벌이는 52만원. 대표적인 노동빈곤층(중위소득 50% 미만인 계층)이다. 반면 고씨의 월급은 360만원으로 중산층 이상이다. 이 두 사람이 10년(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납부기간) 동안 꾸준히 국민연금 보험료를 냈다고 가정하자. 만 60세가 넘어 두 사람이 각각 받게 되는 연금은 얼마일까.
두 사람이 내야 하는 월 연금보험료는 똑같이 월 소득의 9%다. 저씨는 월 4만6,800원씩을, 고씨는 32만4,000원씩을 내야 한다. 이렇게 10년을 낸 뒤 두 사람이 받는 연금은 저씨가 월 13만5,510원, 고씨가 월 31만3,580원이다. 저씨가 그간 낸 보험료(561만6,000원)는 고씨(3,888만8,000원)의 7분의 1수준이지만, 받는 연금은 고씨의 43%로 낸 보험료에 비해 훨씬 많이 받게 된다. 국민연금이 저소득층에 유리하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을 소득재분배 기능을 하는 사회보장제도라고 일컫는 이유다.
이런 수익보장 구조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에선 저씨와 같은 저소득층의 연금 가입률이 당연히 높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펴낸 '근로빈곤층을 위한 자립촉진지원제도 도입방안 연구'를 보면, 근로빈곤층 가운데 국민연금의 테두리에서 사실상 벗어나 있는 이들이 37.8%에 달했다. 이 중 연금보험료를 내기 어렵거나 소득이 없다고 신고한 납부예외자가 17.5%, 연금 미가입 가구가 17.1%였다. 3개월 이상 보험료를 내지 못한 가구도 3.2%였다. 또 빈곤층 중 가입 연령층(18세 이상 60세 미만)이 아니거나 이미 연금을 받는 비율이 50.1%다. 결국 전체 근로빈곤층 중 국민연금 가입가구는 12.1%에 불과했다. 과연 국민연금이 사회보장제도로서 기능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이유다.
특히 지역가입자의 경우는 가입률이 현저히 떨어진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올해 5월말 기준 지역가입자 858만7,000명 중 납부예외자는 494만4,000명으로 10명중 6명이다. 이 가운데서 실직ㆍ휴직ㆍ사업중단ㆍ기초생활 곤란 등 경제적인 이유로 연금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420만6,000명으로 지역가입자의 절반에 가깝다. 이렇다 보니 연금 수급 연령인 만 60세 이상의 국민(790만명) 중에서도 연금을 받는 비율은 32%(300만명)에 불과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윤석명 박사는 "최근 3년간의 추이를 보면 평균 500만명이 납부예외자인데 이 중 4년 이상 보험료를 내지 못해 연금의 사각지대에 방치될 우려가 큰 장기 납부예외자는 300만명 가량"이라며 "이들은 노년까지 빈곤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저소득층에 유리한 구조라는데도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간병인 차모(44)씨의 경우를 보자. 그는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져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24시간 환자 곁에 붙어서 고되게 일하고 그가 받는 일당은 5만5,000원. 그마저도 항상 일이 있는 게 아니어서 다달이 그의 손에 들어오는 돈은 일정치 않다. 남편이 버는 돈은 남은 빚 상환에 들어가고, 그가 버는 한달 100만원 안팎으로 고3 자녀의 뒷바라지를 하고 생활비를 쓴다.
차씨는 "내게 국민연금은 사치"라고 말했다. 그는 "남편의 사업이 들쭉날쭉해 지금까지 연금보험료를 낸 기간이 4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며 "지금 형편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보험료를 낼 엄두를 못 낸다"고 말했다. 당장 하루벌이가 막막한 차씨에게 15년 뒤의 노후보장은 꿈 같은 얘기다. 그렇다고 이들을 방치하면 빈곤은 노년이 돼서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인 이상이 제주대 교수는 "하위 30%의 저소득층은 국민연금을 내기만 하면 가장 큰 혜택을 볼 수 있는 이들이지만 당장 소득의 9%를 보험료로 낼 여력이 안돼 가입을 못하거나 납부예외자로 남아 실제로는 혜택을 보지 못할 처지"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저소득층의 연금 가입률을 올리는 방안은 한국사회가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 풀어야 할 필수 숙제로 지적된다.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에서 최근 저소득층의 사회보험료를 국가가 보조해 주는 방안이 논의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6월 "일자리 창출과 저소득층 근로복지 증진을 위해 근로자의 사회보험료 부담을 소득에 따라 최고 절반까지 차등 경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기획재정부는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저소득 근로자 사회보험료 지원'과 관련한 연구용역을 의뢰해 진행 중이다.
같은 당 김성식 의원은 '반값 4대보험' 법안을 3일 발의하기도 했다. 법안의 뼈대는 저소득노동자의 국민연금ㆍ건강ㆍ고용ㆍ산재보험 부담금을 10~50%까지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30인 미만의 사업장에서 주당 평균 36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 가운데 최저임금 130% 이하(2011년 기준 월 117만원선)를 받는 127만명 가량이 대상이다.
저소득층의 연금보험료를 경감해 주는 방안도 거론된다. 석재은 한림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 일부 국가는 소득에 따라 보험료를 달리 내도록 한다"며 "연금이 소득 재분배 효과가 큰 구조인데도 저소득층의 가입 회피 문제가 줄지 않는 만큼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정승임기자 choni@hk.co.kr
■ 20일 이상 일해야 연금 가입되는데…
"비가 계속 내리는 바람에 지난달에 일한 날이 5일뿐인데 어떻게 보험료를 냅니까?"
국민연금 가입여부를 묻자, 송모(57)씨에게서 돌아온 답이다. 송씨는 건설현장에서 철근공으로 일한다. 예순을 앞둔 송씨도 노후에 연금 혜택을 누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송씨와 같은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는 한 달에 20일 이상 현장에서 일을 해야 국민연금 사업장 가입자가 된다. 또는 한달 이상 일하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러나 송씨는 "현장 상황이나 날씨에 따라 다달이 일하는 날이 불규칙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고 근로계약서를 쓸 수 있는 사업장도 거의 없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규정"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송씨와 같은 건설현장 노동자 가운데 40%는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상태다. 곽정숙 민주노동당 의원이 지난해 밝힌 건설업 취업자 중 국민연금 가입자 현황에 따르면, 2010년 6월 통계청 기준 건설업 취업자는 184만3,000명이지만, 국민연금 가입자는 106만3,000명에 불과했다. 곽 의원은 "건설업에 취업해 있는 78만명이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고 지적했다.
건설현장 노동자들은 국민연금 가입 기준 조정을 요구한다. 이영록 건설산업연맹 정책국장은 "직장연금 가입자가 되려면 한 달에 20일 이상 일해야 하는 데 건설현장 고용이 많지 않은 현 상황에서 그렇게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하루만 일해도 가입되는 고용보험처럼 국민연금의 가입기준도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정규직 대부분은 건설현장 노동자와 사정이 비슷하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지난해 6월 내놓은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보고서를 보면, 비정규직 가운데 국민연금에 가입한 비율은 33.1% 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을 저소득층에 유리한 쪽으로 제도 개선을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가운데 하나가 기초노령연금과의 통합방안이다.
'복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인 이상이 제주대 교수는 "기초노령연금과 국민연금은 '노후 소득보장'이란 제도의 목적이 같다"며 "두 제도가 분리돼 있는 건 기형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두 제도를 통합해 소득에 상관없이 만65세 이상 모든 노인들에게 노령연금을 적용하고 연금액도 단계적으로 40만원까지 현실적인 수준으로 상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성재 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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