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장 뽑을 때마다 정권의 거수기… 이사회 구성 방식 바꿔야
공영방송 KBS와 MBC가 처한 위기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정치적 독립성 문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다룬 프로그램의 잇따른 불방이나 취재 중단 지시를 둘러싼 내부 갈등, MBC의 이른바 '소셜테이너 출연 금지' 규정 논란 등은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언론학자들과 시민단체 등은 KBS와 MBC의 공영성 회복을 위해서는 이사회 구성 및 사장 선임 절차 등을 개선해 권력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일보가 실시한 언론학자 설문 결과, 응답자(42명)의 85.7%는 KBS와 MBC가 공영방송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복수응답)로 '사장 등 경영진의 정치적 중립성 문제'를 들었고, 그 다음으로 '정치권의 개입'(33.3%)을 꼽았다. 또 사장 선임제도 개선 필요성에 85.7%(점진적 개선 45.2%, 당장 바꿔야 한다 40.5%)가 동의했고, 현 제도 유지에 찬성한 의견은 4.8%에 그쳤다.
사장과 이사회 구성 정파성 벗어야
KBS와 MBC 사장이 새로 임명될 때마다 '낙하산'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언론특보를 지낸 김인규 KBS 사장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현행 사장 선임 제도 자체가 정부ㆍ여당의 입맛에 맞는 인사의 선임이 가능한 구조라는데 있다.
KBS 사장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임명제청권을 가진 KBS 이사회 이사들 역시 방송통신위원회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한다. 게다가 방통위 상임위원 5명을 대통령이 임명(위원장 포함 2명 대통령 지명, 여당 추천 1명, 야당 추천 2명)하는데다, KBS 이사회도 여당 몫 7명, 야당 몫 4명으로 구성돼 사장 선임에 대통령과 여당의 입김이 그대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임기가 남은 정연주 당시 KBS 사장을 석연치 않은 이유를 내세워 내쫓고 친 정부 인사인 이병순씨를 사장으로 앉힌 것도 이런 구조 때문에 가능했다.
MBC도 사정은 비슷하다. MBC 사장은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에서 사실상 임명하는데, 방통위에서 임명권을 행사하는 방문진 이사 역시 여당측 6명과 야당측 3명으로 구성된다. 대통령이 MBC 사장을 직접 임명하지는 않지만 영향력을 얼마든지 행사할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실제 김재철 사장이 지난 2월 연임될 때 이사들은 여당측 5명 찬성(1명 기권), 야당측 3명 반대로 갈렸다. 강지웅 MBC 노조 사무처장은 "과반수 찬성제여서 야당측 3명 모두 반대해도 소용없다. 이사회가 정권의 거수기에 불과한 셈"이라고 말했다. 최근 사표를 제출한 김재철 사장의 재선임 과정에서도 문제가 되풀이됐다. 방문진은 새 사장 공모 절차도 없이 김 사장을 단독 후보로 올려 여당 6명 전원 찬성과 야당 3명 전원 기권 속에 재선임했다. 여당측 이사들이 담합하면 어떤 편법적 결정도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사장 선임만이 문제가 아니다. KBS 이사회나 방문진의 여당측 이사들이 정치적 이해에 따라 경영진을 비호할 경우 공영방송에 대한 감시, 감독 기능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유영주 상임정책위원은 "최근 민주당 도청 의혹 사건에 대해 KBS가 경찰 수사를 지켜보겠다는 입장만 내놓는 것도 이런 공적 감시기능이 마비된 상태임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손영준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최근 한국일보에 게재한 칼럼에서 "대통령과 여당이 KBS 사장과 이사회 인선을 주도한다면 정치적 독립성 시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내년 말에 대통령 선거가 있기 때문에 올해가 관련 방송법을 개정할 적기"라고 지적했다.
구체적 개선안으로는 KBS 이사회와 방문진 이사 추천을 특정 정당이 과반수로 하지 못하게 하거나, 사장 선출 등 주요 사안의 경우 특정 정당측 이사들의 찬성만으로 통과되지 못하도록 과반수 찬성에서 3분의 2 찬성으로 바꾸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수신료 산정ㆍ감독, 독립기구에 맡겨야
KBS의 도청 의혹 사건으로까지 번진 수신료 인상 문제는 어느 정권에서나 '뜨거운 감자'였다. 공영방송을 유지하려면 적절한 수준의 수신료 인상이 필요하지만, 정권이 방송 장악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야당은 물론 실제 수신료를 부담하는 국민들의 동의를 얻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KBS의 공정성 제고 방안과 더불어 수신료를 합리적으로 산정하고 그 쓰임새를 감독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가칭 '수신료 위원회'를 구성해 KBS 이사회가 갖고 있는 수신료의 산정, 배분 권한을 넘기는 것이 하나의 대안이다. 수신료 위원회가 공영방송의 재원 운용을 관리 감독할 수 있게 되면 부적절한 예산 사용을 줄여 공영방송에 요구되는 사회적 책무만 아니라 자연히 정치적 독립성도 확보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수신료 위원회를 계층별 대표 13명과 지역 대표로 16개 광역자치단체장이 추천하는 16명, 교육ㆍ문화ㆍ복지ㆍ인권 등 시민사회 부문을 대표하는 10명 등 총 39명으로 구성하자는 구체적인 안도 내놓고 있다.
유영주 상임정책위원은 "KBS도 수신료 위원회에 동의를 하지만 KBS 이사회 안의 종속 기구로 두려고 한다"며 "수신료 위원회를 국회에 위치시켜 독립된 지위를 보장받는 기구로 하지 않는 한 그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고 말했다.
공영방송의 근간에 대한 장기적 논의 필요
공영방송을 둘러싼 논란은 미디어렙(방송광고 판매 대행사) 문제에서도 불거지고 있다. 한국방송광고공사(코바코) 독점체제에 대해 2008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뒤 대체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종합편성(종편)채널이 출범하는 하반기가 되면 광고시장이 무한경쟁판으로 변질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이 가운데 MBC가 '1사 1렙', 즉 자사 미디어렙을 통해 광고 영업을 직접하겠다는 뜻을 비치면서 이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김민기 숭실대 언론홍보학과 교수는 "MBC가 민영 미디어렙을 선택하는 순간 국내 방송의 공영성, 공정성 등이 무너질 수 있는 만큼, MBC는 조직이기주의를 넘어 우리나라 방송 시스템에 대한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번 기회에 다공영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일보가 실시한 언론학자들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52.4%는 가장 이상적인 지상파 방송 구조로 '1공영 2민영'을 들었고, 현재와 같은 '2공영 1민영'에 찬성한 이는 33.3%였다. 한 언론학자는 "사실 MBC는 소유구조는 공영이라고 하지만 재원을 모두 광고로 충당하는 기형적인 구조"라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공영방송의 제자리잡기를 위해서도 민영화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 외국의 공영방송 감독 제도
대표적인 공영방송으로 꼽히는 영국 BBC나 독일 ZDF 등도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최대 과제다.
BBC는 2007년 경영위원회 대신에 더 독립적이고 막강한 권한이 부여된 트러스트 제도를 도입했다. 영국이 BBC 경영위원회를 폐지한 이유는 2004년 경영위원회가 정치권력의 압력을 받아 당시 최고경영자 그렉 다이크를 해임했다는 의심을 받는 등 BBC에 대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조사, 감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BBC 경영위원회는 BBC 내부에 있어 경영과 감독이 분리되지 않은 점이 문제였다.
그 대안으로 도입된 BBC 트러스트는 정파적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따라서 집권세력의 영향력을 크게 받지도 않는다. 정준희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BBC 사장 선임은 BBC 트러스트 위원이 '투표에 의한 결정'을 요구하지 않으면 전체 합의에 따르는데, 관례적으로 투표가 아닌 전체 합의로 이뤄진다"며 "특히 사장이 될만한 인물에 대해서는 BBC 내외의 광범위한 합의나 지지 등이 크게 영향을 미쳐 의외의 인물이 사장에 선임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독일의 공영방송 규제 시스템은 철저히 방송 권력 분립과 분점 원칙에 의존한다. 연방헌법재판소와 주의회 등이 방송입법기구의 역할을 하고, 방송위원회와 행정위원회가 프로그램과 광고 준칙 등을 방송사에 부여하며, 그 수행을 감독ㆍ규제하는 역할은 사장과 임원, 편성위원회 등이 맡고 있다. 각 공영방송을 감독, 규제하는 기구인 방송위원회는 정치ㆍ경제ㆍ사회적 세력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방송사 외부에 설치했다. 특히 연립주의적 원칙에 따라 11개의 공영방송사들은 모두 독립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어, 각 방송사마다 개별적으로 방송위원회가 설치돼 있다. 방송사 사장과 임원을 선임하는 역할도 전적으로 방송위원회가 맡고 있다.
11개 공영방송위원회 중 규모가 가장 큰 ZDF 방송위원회를 보면 위원 수가 총 77명으로 정부와 종교, 시민 사회단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위원을 선출해 지역 및 계층을 아울러 대표성을 확보하고 있다. 정준희 교수는 "ZDF는 이런 과정을 통해 공영방송사가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살핀다"며 "ZDF는 또 방송사에서 독립된 외부 위원회를 통해 수신료를 합리적으로 책정한다"고 말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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