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iron fist)에서 철창(iron bar)으로'
현대판 파라오로 불리며 30년간 절대권력을 누리던 호스니 무바라크(83) 전 이집트 대통령이 결국 피고인 자격으로 법정에 섰다. 반년 전만 해도 그가 이토록 초라한 말로를 맞을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무바라크는 3일 이집트 카이로 경찰학교 임시법정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 "모든 공소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한다"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TV를 통해 생중계된 이날 공판에서, 무바라크는 창백한 얼굴로 철창 속 피고인석 이동침대에 누운 채 심리를 지켜봤다.
두 아들 가말과 알라도 권력남용과 부패 혐의로 함께 법정에 섰지만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유혈진압에 가담한 하비브 알 아들리 전 내무장관 등도 피고인으로 출석했다.
무바라크에게 적용된 죄목은 ▦권력을 남용해 부정한 돈을 축재하고 ▦2월 민주화 시위에서 850여명의 사망으로 이어진 유혈진압을 지시한 혐의 등 두 가지다. 유죄로 인정되면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무장병력 수백명이 법정 주변에서 삼엄한 경비를 펼친 가운데, 공판 시작 직전 무바라크 지지자와 민주화 시위대 사이에 투석전이 벌어지는 등 긴장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무바라크에 대한 공판은 2월 민주화 시위만큼이나 이집트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 사법부가 무바라크를 제대로 단죄할 수 있는지에 따라 최근 다시 격화한 반정부 시위의 양상이 크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성지 타히르 광장에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는 이집트 국민은 무바라크를 대신해 권력을 쥔 군부에 ▦개혁 속도를 높이고 ▦무바라크 등 구 정권 책임자를 조속히 처벌하라고 요구해 왔다.
그러나 알자지라 방송 등에 따르면 현지에서는 무바라크에 대한 처분이 기대에 훨씬 못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변호인단이 "무바라크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다"며 방어막을 치고 있는데 군부가 이를 핑계로 중형을 선고하지 않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으려 한다는 이야기다. BBC도 카이로대학 무스타파 카멜 교수의 분석을 인용해 "사령관(공군 사령관 출신의 무바라크)을 모욕해선 안 된다는 인식이 군부에 퍼져 있다"며 이런 예측에 힘을 보탰다. 군부 최고위층인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장군이 과거 무바라크를 호위하던 대통령 경호대 책임자였다는 점도 공판 결과에 변수가 될 것이라고 카멜 교수는 내다봤다.
하지만 무바라크가 혐의에 비해 경미한 처벌을 받거나 병을 이유로 사면받는다면, 이집트 민주화 시위는 본격적으로 군부 퇴진을 요구하는 투쟁으로 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군부와 시위대 사이에 대규모 유혈충돌이 재발할 우려도 있다. 반대로 무바라크 지지층이 "유죄가 나오면 교도소를 파괴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어 공판 결과가 민-민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다.
공군에서 25년간 복무하다 1975년 부통령에 오른 무바라크는 81년 무아마르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에 반대하는 괴한의 총에 암살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는 다섯 차례 임기(30년) 동안 이스라엘에 빼앗겼던 시나이 반도를 반환받고 수 차례 중동평화협상을 중재하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면서 아랍의 맹주 역할을 자임했다. 그러나 각종 부패 의혹에 연루되고 국민의 민주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올해 2월 대규모 민주화 시위에 떠밀려 권력을 내놓았고 홍해 휴양지 샤름 엘 셰이크의 병원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무바라크는 중동 현대사에서 국민의 힘에 밀려 재판까지 받은 첫번째 국가 지도자로 기록됐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도 법정에 섰지만 그것은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결과였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