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어제 "미국이 세계 경제에 기생충과 같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 세계 언론이 보도했다. '기생충'여부를 떠나 왜 푸틴 총리의 발언이 러시아의 입장인 양 세계의 관심을 끄는 걸까. 총리 위에 엄연히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있는데도 말이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도 백악관이 있다. 우리의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인 셈인데, 하얀 대리석 건물(벨리 돔ㆍ화이트 하우스)이어서 모두들 백악관이라 불렀다. 조금 떨어진 곳의 붉은광장에 크렘린(성채)이 있으며 그 성채 안에 대통령궁(우리의 청와대)이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주최한 한ㆍ러 언론교류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모스크바에 크렘린과 백악관이 공존하는 것을 알았다. '크렘린=메드베데프 대통령', '백악관=푸틴 총리'로 통용됐다.
이미 굳어져버린 '푸틴 대세론'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최근 인터뷰가 흥미롭다. 한 달 전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회견에서 "(개인적으로) 대통령직 연임을 원하고 있지만 푸틴 총리와 내년 대선에서 경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누가 후보가 될 것인지는 양측(크렘린과 백악관)이 합의해서 결정할 일"이라면서 "우리는 정치적 동지이고 같은 정치세력을 대표하며, 따라서 양측이 경쟁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와 목표를 달성하는 데 손해가 될 뿐이다"고 밝혔다.
그는 러시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재선 희망'을 숨기지 않았다. 푸틴 총리가 두 번의 대통령 재임 시절 추진했던 중앙집권식 통치와 국가주도 경제정책을 개혁 대상으로 지목하면서 "자유롭고 경쟁적인 정치체제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푸틴의 자원의존형 경제모델 대신 정보통신과 항공우주 산업을 주축으로 하는 경제모델을 계속해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2004년 푸틴 대통령 시절에 폐지했던 주지사 직선제를 부활하겠다는 야심찬 개혁안도 내놓았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공약과 약속은 국영TV나 정부 주도신문에서조차 떳떳하게 발표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른바 '푸틴 대세론' 때문이다.
우리의 의미로 본다면 '푸사모' 쯤에 해당하는 '나로드니 전선(인민전선)'에 가입하려는 개인과 단체가 전국에서 줄을 잇고 있으며 총리실이 주도하는 정당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푸틴 총리의 인터넷사이트에 접속해 그의 정책을 지지한다는 의사표시를 하면 되는데 신청자는 폭주하는 반면 웬만해서는 가입 승인을 받기 어려울 지경이라고 한다. 차기 총선의 후보자가 되려면 최소한 '푸사모'의 멤버가 되어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내년 3월 현직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지만 대선에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후속 인사에 대한 전망이 더 관심을 끌고 있다. 현직 재무장관이 차기 총리가 될 것이며, 현직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장으로 가게 된다는 얘기들이 그것이다.
러시아에도 물론 권력비판 언론이 없지는 않다. 정부의 간섭을 덜 받는다는 '20%의 언론' 가운데 선두 주자인 MK신문 간부의 말은 이미 '푸틴 대세론'이 논(論)이나 설(說)이 아니라 기정사실화했음을 짐작케 했다. 그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 푸틴 대세론을 저지하고 나서야 할 국회와 언론, 시민단체들까지 이미 제 기능을 포기해 버렸다"면서 "언론인으로서 웃음을 잃었고, 언론사로서 이미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생(메드베데프)이 어찌 형(푸틴)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한국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만드는 기술만이 아니다"라고 푸념하고 있었다.
새로운 극동정책에 관심 가져야
러시아는 이미'푸틴 대통령' 체제로 접어들어 있었다. 4년의 임기를 6년으로 늘리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니 어쩌면 향후 12년까지 '푸틴의 러시아'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한 러시아가 요즘 들어 유럽에서 극동지역으로 관심을 돌리며 우리를 활용할 방안을 찾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러시아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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