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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었다' 잔인한 학살극 현장에서도 누구는 웃고 누구는 훔쳐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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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었다' 잔인한 학살극 현장에서도 누구는 웃고 누구는 훔쳐 먹고…

입력
2011.07.29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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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었다/타데우슈 보롭스키 지음ㆍ정보라 옮김/

파란미디어 발행ㆍ392쪽ㆍ1만3,000원

'사람들의 무리 뒤로 친위대 장교들이 상냥한 웃음으로 행진을 재촉하며 천천히 걸어간다. 웅덩이 쪽으로 달려가 갑작스럽게 바지를 끌어내리며 그 안에 쭈그리고 앉는 어떤 노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린다. 친위대원은 노인에게 점점 멀어지는 무리를 가리켜 보인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지를 끌어올린 후 우스운 모양새로 펄쩍펄쩍 뛰며 무리를 뒤쫓아 간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그토록 서둘러 가스실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어서 웃는다.'(118쪽)

죽음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가는 사람에게 잔인한 웃음을 던지는 죄수들.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대인 학살 장면을 묘사한 이 글은 매일 되풀이되는 무고한 죽음 앞에 무뎌진 인간의 비인간적인 심리를 정확하게 집어낸다.

폴란드 작가 타데우슈 보롭스키(1922~1951)는 1943년 2월 지하 저항군에 가담한 혐의로 정치범으로 체포됐다. 유대인이 아닌 순수 폴란드인 부모를 뒀고, 젊고 건장한 남자인 탓에 가스실로 가는 것은 면했지만, 1945년 9월 풀려날 때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었다> 는 그가 수용소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바탕으로 쓴 단편소설 9편과 수필 '돌로 된 세상'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책에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유대인의 죽음 앞에 눈감을 수밖에 없었던 저자의 시선이 스산하게 배어있다.

1939년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무렵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치른 폴란드의 열일곱 살 소년의 시선에서부터 책은 시작된다. 시험에 합격한 소년은 전쟁 통에 건설회사에서 일하며 시멘트를 독일 군수물자로 암거래하며 번 돈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불투명한 희망은 약혼녀 마리아가 독일군에 붙들리면서 사라진다. 소년도 정치범으로 몰려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소년은 매일 굴뚝으로 향해 한 줌의 재로 스러지는 유대인의 시선과 마주한다. 나아가 가스실에서 수거한 죽은 이들의 옷을 빼앗아 입고 음식을 훔쳐 먹고 귀중품으로 배를 불린다. 생존을 위해 학살을 도와야 하는 수용소가 만들어 놓은 비인간적인 질서에 몸을 바르르 떤다.

소설은 잔혹한 유대인 학살과 살아남은 이의 비참한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의 죽음에 무덤덤해지고 강자의 억압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무기력함이 깔려있다. 1945년 소년은 수용소에서 풀려났지만 수용소 밖의 세상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너무 많은 이의 죽음을 목격한 소년은 죽음에 무덤덤해지고, 그들의 목숨과 맞바꾼 거대한 철로와 공공시설, 아우토반을 감격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후대에 저자는 아무런 희망도 찾지 못한다.

작가는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1951년 서른도 안된 젊은 나이에 딸이 태어난 직후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절망적으로 바라봤을 전후 유럽 사회의 모습에 일제시대에 징용돼 강제노동으로 삶을 마감한 한인 노동자, 60여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풀지 못한 종군위안부 문제 등이 자연스레 오버랩 되어 공감의 지평은 더욱 넓다.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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