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레일이 최근 서울역사 내 노숙인들을 모두 퇴거시키고 있다. 서울시는 노숙인들을 인근 쉼터로 옮겨 재활을 돕겠다고 했다. 어차피 다 쫓아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밥과 잠자리 제공만이 노숙인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노숙인 인문학자' 혹은 '거리의 인문학자'로 불리는 최준영씨는 노숙인들을 위해 근 10년 간 일해 왔다. 그들을 위해 잡지를 만드는 운동도 했고, 인문학 강의도 했다. 함께 술도 마시고 밥도 먹었다. 그들과 가끔 멱살잡이나 욕설도 한다. 그들을 위해 살다가 자신도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런 그가 최근 인문학적 단상을 담은 책 <유쾌한 420자 인문학> 을 펴냈다. 페이스북에 연재한 내용이라 그리 정제되지는 않았지만 '거리의 인문학자'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깊은 내용이 감동적이다. 그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봤다. 유쾌한>
_ <유쾌한 420자 인문학> 에 '420자'의 의미는. 유쾌한>
"트위터는 140자만 쓸 수 있고 페이스북은 420자까지만 쓸 수 있다. 작년에 트위터를 처음 할 때는 특정 이슈가 '확 올라오는'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담벼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유명인이 아니라 그럴 거다. 그래서 일주일 뒤에 페이스북으로 바꿨다. 친구 찾는 재미는 있었지만 신변잡기만 올려놓다 보니 뭔가 표피적이고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진지한 공간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생활을 규칙적으로 하고, 긴장감을 불어넣자는 생각에 420자를 매일 쓰기 시작했다.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라가 홀로 분투하는 김진숙씨 얘기 등은 반응이 좋았다.
매일 출근 전에 글을 올린다. 이제는 글을 올리지 않으면 친구들이 '어제 (술) 많이 달렸나'고 물어본다. 작가가 왜 그렇게 글을 못쓰냐는 비난도 받는다. 하지만 계속 훈련하는 것이다. 실은 어제 쓴 글이 마음에 안 들어서 오늘 또 쓴다. 420자는 제한이기도 하지만 무식을 가려주는 방패이기도 하다. 85회째 연재할 때 그날 페북 친구를 맺은 사람이 연락이 왔다. 출판사 사장인데 한번 만나자는 것이다. 2시간 후에 출판사에 갔더니 계약서 써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100여회 쓰고 출판했다. 마음에 안 드는 글도 많다. 분량이 모자라서 노트에 썼던 서평도 보탰다."
_ 저서를 뒤져봐도 학력, 출신학교, 나이가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학위도 없으면서 교수 명함을 든 사이비'라고 했던데.
"사실은 자랑스럽지 않아 쓰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크레인에서 고군분투하는 김진숙씨의 저서 <소금꽃나무> 의 영향도 있다. 김씨는 운동권에 학출(대학생 출신)들이 들어오면서 학번을 묻는 인사를 하더라고 했다. 초ㆍ중학교 나온 사람들밖에 없는데 철딱서니없는 학출들의 '몇 학번이냐'는 말에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노동판에서 학번 얘기 하지 말라, 상대방에게는 상처일 수 있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사실 나는 내세울 것도 없다. 명문대를 나왔다면 내공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학벌이 없으면 '네가 뭘 아느냐'는 비아냥을 하는 것이 문제다. 소금꽃나무>
나는 어릴 때부터 목욕탕 심부름, 당구장 게임돌이, 구두공장 쪽쟁이 일 등을 다양하게 해봤다. 중학교 졸업하고 낮에는 구두공장을 다니고 밤에는 대학 운동권 학생들이 가르치는 야학에서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공돌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항상 <좁은 문> <데미안> 등을 들고 다녔다, 대학생으로 봐줄까 해서. 라면 끓여먹고 야학에서 새벽 4시까지 공부했다. 책상에서 엎어져 자고 일어나서 아침 7시까지 공장에 가서 일하고, 다시 밤에 야학 가서 공부했다.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도와주시고. 검정고시 통과한 뒤 1년간 공부를 더했다. 그래서 외국어대 중국어과를 갔다. 대학에서도 야학 교사를 1년 반 했다. 그런데 제적 3번 당하고 졸업은 못했다. 글쟁이가 되려 했는데 학벌이 뭐가 필요하나 생각했다. 시나리오 써보겠다고 영화기획사도 차려봤다가, 시나리오작가협회 사무국에서 근무도 했다. 씨네21 사업기획자로 들어갔다가 편집장이랑 대판 싸우고 1년 만에 뛰쳐나와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그래서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데미안> 좁은>
_ '노숙인 인문학자 ' '거지 교수'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한다. 2005년에 성프란시스대학이라는 것이 설립이 됐는데, 성공회 임영인 신부님 등 3, 4명이 모여서 만들었다. 발제는 임 신부님이 했다. 노숙인들에게 밥이나 잠자리도 좋지만, 정신적인 희망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였다. 물론 롤모델이 있었다. 클레멘트 코스라고, 1995년도에 미국의 극작가 출신인 얼 쇼리스가 뉴욕 주변에 노숙인들을 모아놓고 플라톤 등 철학을 가르쳤다. 전혀 학교도 안다녔던 사람들인데 계속 공부를 해서 의사나 변호사가 된 것이다. 우리도 해보자고 해서 2005년 9월에 서울역 근처의 노숙인들을 모아놓고 인문학 강의를 시작했다. 그 강의에서 나는 글쓰기와 문학을 맡았다. 첫 번째 강의도 내가 했다. 나름 역사적인 사건이다.(웃음)
1학기는 글쓰기, 예술사, 철학을 강의하고 2학기는 문학, 역사, 글쓰기를 강의한다. 글쓰기는 내가 붙박이로 매 학기마다 강의를 했다. 노숙인 인문학 강좌에 참여한 사람들이 7년간 100여명 된다. 나는 태생 자체가 노숙인들과 다르지 않아서 금방 동화가 되고 잘 어울렸다. 같이 머리 맞대고 술도 마시고 고민했기 때문에 줄기차게 강의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_ 강의를 계속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회당 10만원의 강사료 받아서는 노숙인들에게 책 사주고 밥 사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구조적으로 풀어야겠다고 고민을 하다가 '빅이슈'라는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당초 영국에서 노숙인들을 위해 만든 잡지다. 정치인 언론인 지인 등을 찾아 다니면서 창간하자고 했다. 그들은 '종이매체 위기의 시대에 웬 잡지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잡지의 정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경우 우리나라에 없는 나눔문화의 총아로, 노숙인들과 대학생들이 판매, 시민들은 구매를 돕고, 사진작가는 사진을 기부하고, 배우들은 표지에 무료로 나오고, 지식인들은 글을 쓴다. 그런 취지에서 2년 동안 떠들고 다녔는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에 직접 가서 '빅이슈'의 노하우와 운영방식 등을 배워와서 3~4년간 창간 작업을 했다. 당시 신문에 글도 썼다. 빈곤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인식이 너무 빈곤하다는 내용이었다. 빈곤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롤러코스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누구라도 장애인이나 빈곤층이 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빅이슈' 창간운동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취지의 글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재력이 달려 교회법인으로 넘겼다. 오랫동안 노숙인 쉼터를 운영한 곳이었다. 몽땅 넘겨줬다. '빅이슈'가 만들어지는 것이 목표였지 꼭 내가 발간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를 못 넘겼다. 그 동안 쌓인 빚이다. 덕분에 신용불량자가 됐다."
_ 별명은 마음에 드나.
"작년에 노숙인 인문학 강의를 모아서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 라는 책을 냈다. 집달리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딸아이는 '아빠, 피아노 없어지는 거야?'라며 절망했다. 그동안 블로그에 인문학에 대한 소회를 써온 것들을 모아서 출판사에 넘겨주고 선인세를 받아서 급한 불을 껐다. 황급히 엉성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게 노숙인 강의 경험담으로는 최초의 책이다. 나의 첫 저서다. 한 언론에서 '거지 교수'라는 별명을 붙이고는 괜찮느냐고 물어왔을 때 문제없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내 생각이 좀 짧았던 듯했다. 나 혼자의 문제가 아니라 인문학을 매개로 만났던 노숙인 수강생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좋아한다." 책이>
_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나.
"처음에 삼성코닝에서 돈을 대줬다. 기업이 돈을 대다 보니 우습지도 않은 일이 발생했다. 학기말이 되면 성과를 보고하라고 했다. 출석율, 과제 제출율, 변화의 조짐은 보이나 등등. 몇 년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달랑 한 학기 동안 일주일에 두세 번 강의를 하고 변화를 했는지 성과를 내라니. 인문학은 성과를 내는 학문이 아니다. 기업에서 주는 지원금이 고맙기는 하지만. 결국 대학이 나서야 한다고 해서 경희대에서 나선 것이다. 당시 경희대에 실천인문학센터가 설립되고 공동연구원으로 제안서를 내 거기 소속으로 있었다. 4년 있었으나 벌이는 전혀 안됐다. 작년에 지방선거 때 연설문 몇 번 썼는데 군포시에서 같이 일 좀 하자고 했다. 지금 계약직으로 있다.
다른 곳에서도 특강 제안이 많다. 시ㆍ군등 자치단체나 도서관, 교도소, 장애인복지관 등 돈 없는 곳에서 많이 불러준다. 싸서 부른다고 한다. 강사료를 많이 안 줘도 오니까. 처음에는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만 그들에게 변화한 이들의 에피소드도 들려주고 어렵지 않게 설명한다. 내가 지적 수준이 '저렴하기' 때문에 어려운 용어를 쓸 줄 모른다. 그래서 어른들도 까르르 웃으시며 인문학이 이런 거구나라고 한다. 근 10년 이어져온 활동이기 때문에 계속할 것이다. 소박하지만 나누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지나친 승자독식에 빠져있고, 패자부활이 안 되는 분위기다. 하지만 몸이 불편하고 실패를 거듭한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몸 속에, 정신 속에 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_ 노숙인 대상 인문학 강의의 계기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달라.
"임영인 신부님이 수원에서 활동할 때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열었다. 이들을 위한 소식지에 나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써달라고 했다. 한두 번 썼더니 원고료는 안주면서 후원도 하라고 해서 글과 돈까지 매달 보냈다. 임 신부님이 몇 개월 지나서 서울역에 '성공회 다시서기 지원센터' 소장으로 가는데, 노숙인들을 위해서 인문학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다. 소위 A급 교수들은 거절해서 나에게 왔단다. 그래서 내가 대신 맡은 거다. 과연 내가 교수라고 불리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권위의 상징인 교수가 학교 담벼락 속에 유폐돼 있다가 거리로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거리에서 강의하는 사람도 교수다. 폴리페서는 교수 타이틀을 달고도 강의하지 않는다. 성프란시스대에서 7학기 동안 강의했다. 이후 여기저기서 인문학 강좌가 개설되는 곳에는 다 불려 다녔다.
문화권력이라 자처하는 강의 경력이 많은 교수들도 노숙인들 앞에서는 깨진다. 그들은 같은 연령, 같은 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노숙인들은 직업도 천차만별, 나이도 그렇고 관심사, 학력수준 모두 다르다. 어디다 눈을 맞춰야 할지 모른다. 생뚱맞은 의견, 다양한 질문이 나온다. 모든 곳에 다 기준을 맞출 수 없다면 개개인을 이해해야 한다. 노숙인들은 비평 능력이 뛰어나다. 신문을 가장 열심히 본다. 단신까지 읽고, 심지어 덮고 잔다. 신문사가 고마워해야 한다.(웃음) 당시 노숙인 20명 중 13명이 졸업했다. 그 중 12명이 취업을 했다. 비록 일용직이지만, 개인회생 신청하고 술을 극복했다."
_ '인문학을 살린 사람들이 노숙인'이라고 했는데.
"그 때 죽어가는 인문학을 살린 주인공들이 노숙인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005년에 시작된 노숙인 강의는 점차 재소자, 저소득층, 장애인, CEO, 백화점을 다니는 주부 등을 위한 인문학으로 발전했다. 이제는 모든 계층 사람들이 인문학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이 열풍을 선도한 사람들이 바로 노숙인들이다. 거리에서 치워져야 할 사람들이 인문학을 가장 먼저 했다. 노숙인들은 주면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다. 밥, 잠자리도 받는다. 인문학도 그렇다. 그들은 시간과 마음이 비어 있었다. 그래서 인문학을 받아들였다. 뭔가를 주면 고마워하는 사람들이다. 미국도 지금은 MBA과정에서 인문학을 한다. 스티브 잡스도 애플의 혁신은 인문학에서 나온다고 했다. 우리도 미국도 인문학은 바닥에서 다시 출발했다."
_ 노숙인에게 인문학은 어떤 의미가 있나.
"직장 잃고 돈도 한 푼 없는 사람들은 연락할 곳도 없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경제적 요인 때문에 노숙한다. 노숙인은 집이 없는 사람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 연락할 곳이 없다. 우리 사회가 노숙인들에게 일자리를 줘본 적도 없다. 하지만 인문학을 매개로 이들에게 사회가 말을 걸어준다. 그들에게 사회가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먹을 것만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를 준다. 오히려 더 괴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인문학을 통해 한마디로 이들에게 관계망을 형성시켜 준다. 노숙인들끼리, 강의 기수별, 교수와 노숙인 등등의 관계가 서로 생겨난다. 그들도 의지할 곳이 생긴다. 그들과 밥도 먹고 술도 자주 먹는다. 가끔씩 밤에 전화도 온다. 돈 꿔달라는 얘기가 대부분이다. 어떤 교수는 전화를 받으면 내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는 경우도 있다. 황당하지만 나도 신용불량자인데 너무 한다는 생각도 든다."
_ 일반인에게 인문학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면.
"20세기는 사회과학의 시대였다. 노하우를 터득하기 위해 발버둥쳤다. 어떻게 잘 살 것인가, 어떻게 혁명과 민주화를 이룰 것인가, 어떻게 아파트 평수와 재산을 늘릴 것인가 등등. 하지만 삶의 환경이 훨씬 좋아진 지금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경제성장도 이루고 소득수준 높아졌지만 더 힘들어지고 각박해졌다. 경제환경이 좋아진다고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면 새로운 길은 뭔가. 한두 발짝 물러나서 보는 것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는 것이 인문학이다. 노하우(know-how)가 아니라 노와이(know-why)를 찾는 것이다."
▦최준영은 누구
호적으로 1966년 서울생이지만 어머니 말씀으로는 아마도 1~2년은 더 살았을 거란다.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식모살이를 했던 어머니와 오랜 기간 눈치밥을 먹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구두공장에서 쪽쟁이질(본드로 구두 아래위를 붙이는 것)을 하며 야학을 다녀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외국어대 중국어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과 야학 등으로 3차례 제적을 당한 뒤 결국 졸업을 못했다. 석ㆍ박사학위는커녕 대학졸업장도 없지만 최근까지 경희대 미래문명원 실천인문학센터 교수를 지냈다.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시나리오 부문)로 등단했다. 이후 SBS와 교통방송 등에서 책소개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고, 지금은 계약직으로 군포시청 홍보팀장을 맡고 있다. 노숙인, 수감자, 저소득층 등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하지만 본인도 신용불량자다. 최근에 <유쾌한 420자 인문학> 이란 책을 썼다. 유쾌한>
조재우 선임기자 josus6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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