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1초들/곽재구 지음/톨 발행ㆍ352쪽ㆍ1만3,800원
정치가 피폐하고 삶이 척박한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스무살 시인은 그때 하루 24시간 8만6,400초를 다 기억하고 싶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어떤 1초는 무슨 빛깔의 몸을 지녔는지, 어떤 1초는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떤 1초는 지금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 어떤 1초는 왜 깊은 한숨을 쉬는지 다 느끼고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거 같아서였다.
그때 그를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준 시가 있었다. 타고르의 시편들이다. 곽재구와 동의어라고 해도 좋을 시 '사평역에서'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게 1981년이다. 한 초 한 초를 느낄 수 있어야 좋은 시가 나올 거라는 믿음은 적어도 그에게는 허황되지도, 강박적이지도 않은 현실이었던 게다.
<우리가 사랑한 1초들> 은 그 타고르를 좇아 시인이 2009년 7월부터 1년 반 동안 인도 북동부 벵골주의 산티니케탄에 머물며 만난 사람들 이야기, 그들과 어울리며 맛 본 시간의 향기에 대한 이야기다. 산티니케탄은 귀족계급이던 타고르의 고향이자 그가 계급과 빈부 격차를 타파하기 위해 '아마르 꾸띠르(나의 오두막집)'라는 농촌공동체를 세운 곳이다. 우리가>
'오래 묵힌 마음의 여행을 시작'한 시인은 그곳에서 타고르의 모국어인 벵골어를 익혀 타고르의 시들을 한국어로 직접 번역할 생각이었다. 인도 이름 '쫌빠다'로 지낸 그 시간 동안 그 작업 못지않게 큰 기쁨을 준 건 가난하지만 자연과 어우러져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8년 전 방문했을 때 신발 살 돈 쥐어준 걸 잊지 않고 특별히 새로 끓인 차를 대접해 준 아가씨, 곱게 접은 종이배를 보따리에 넣고 팔러 다니는 소녀, 늘 꽃들과 인사하는 자전거택시 운전사, 나무그늘 아래서 수업하는, 저자의 눈에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학교에서 그는 '가난하고 소박하고 평화롭고 따뜻하게 인생을 배'우고 돌아왔다. 뭔가를 물으면 모른다고 하지 않고 다들 제각각으로 대답하는 인도인들에게서 삶이란 '이렇게 저렇게 다 헤맨 뒤에야 지혜의 길에 도달할 수 있는' 거라는 지혜도 얻었다.
산티니케탄에서 시인은 생애 두 번째로 '삶이 지닌 1초 1초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 540일 4,665만6,000초의 시간들이 하나씩 꽃다발을 들고 다가와 다정하게 인사하고 다시 손 흔들고 시인을 지나쳐가는 풍경이 조용히 떠오른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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