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6ㆍ25 전쟁 중 8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북으로 데려갔다.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이나 청년들이 타깃이었다. 전쟁 병력을 비롯해 전후의 국가 건설에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60년 이상이 지났지만 납북자의 생사는 오리무중인 경우가 많다. 정부의 무관심 역시 변한 게 없다.
2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잊혀진 전쟁 납북자를 기억하고 명예회복을 촉구하기 위한 '8만 6ㆍ25전쟁 납북자 기억의 날' 행사가 6ㆍ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하 가족회) 주관으로 열렸다.
행사에는 1950년 납북된 김점석(당시 37세)씨의 두 딸인 가족회 이사 김지혜(70)씨와 영명(64)씨 자매도 참석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그해 7월 용산 정치보위부(현재의 용산경찰서) 직원들이 "물어볼 말이 있다"며 데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1ㆍ4후퇴 직전 아버지의 고향 지인이 평안북도 만포진 식당에서 아버지를 봤다는 게 마지막 들은 목격담이었다. 몇 년 전 이산가족 상봉 요청을 했으나, 당국은 "생사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김점석씨는 남한에서 유명한 법조인이었다. 일본 중앙대 법학과를 마치고 39년 일본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 후 부산지검 검사 시보를 시작으로 평양지검, 군산지검, 청진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했다. 당시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암살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의 담당 검사를 맡았고 해방 후엔 서울지검 부장검사를 역임했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김씨 가족에겐 정부의 무관심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김지혜씨는 "당시 '납치된 사람들이 돌아오면 자리를 뺏길까봐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정부는 납북자 문제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는데,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가족회 관계자도 "정부의 납북자 외면은 도를 넘어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는 비판이 거세지자 뒤늦게 지난해 12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를 출범시켰지만, 활동은 미미하다.
2000년 설립된 가족회는 북한이 납북 사실을 인정할 것과 정부에는 피랍자들에 대한 생사확인, 유해 송환 등을 요구하고 있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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