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이 섬에 포클레인의 삽날이…
통발로 잡은 소라를 안주 삼아 소주 몇 잔씩 들고 나더니 언성이 높아진다.
"결국 문제는 돈 아니에요? 아홉 집밖에 안 되는데 시민단체가 나서 모금을 해서라도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섬을 지키자' 그렇게 설득하면 되는 거 아녜요?"
"이건 이 마을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옹진군의 문제이고 인천시의 문제, 나아가 개발 광풍이 부는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에요. 우리가 찾는 건 보편적인 해결책이라구요."
인천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를 처음 안 건 17년 전이다. 그때 이 섬은 핵폐기장이 될 뻔했다. 치열했던 반대 시위와 백지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가맣게 잊었다. 22일 '굴업도를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과 함께 마침내 찾아간 섬마을은 다시 존폐위기에 놓여 있다. 섬을 통째로 사들인 CJ그룹이 골프장을 지으려 하기 때문이다. 빈 밥공기와 국그릇을 치운 저녁상에 소주 두어 병 얹은 단출한 술자리. "가볍게 얘기나 하자"던 자리는 자정 넘도록 무거운 토론으로 이어졌다.
1994년 노랗고 검은 색의 방사능 표식 깃발로 뒤덮인 굴업도 사진을 보면서 머릿속에 각인된 것은, 날을 세운 반핵 논리가 아니라 목과 허리를 가늘게 늘인 굴업도의 선이었던 것 같다. 낭창낭창하되 천박하지 않은 개머리 언덕과 목기미 해변의 곡선. 서해의 소금바람이 누만 년 화산재 덩어리를 깎아 만든 작품이다. 깊은 해무에 싸인 섬은 이틀 일정 내내 그 몸매를 보여주지 않았는데, 망각 저편에 있던 선이 살아나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일망무제의 바다 위에 만곡(彎曲)으로 누운 자연의 선. 하지만 이 선은 곧 포크레인의 삽날에 찍히고 깎여 삭막한 인공의 라인으로 바뀔 위기에 처했다.
"등산하기도 좋고, 야영하기도 좋고, 그냥 멀리서 바라만 봐도 좋아요. 하지만 골프장을 만들려면 저 개머리 언덕을 대부분 깎아내야 해요. 이 좁은 섬에 골프 치러 온 사람 말고 발 디딜 곳이나 남겠어요? 어휴… 정말 개발을 할 수밖에 없다면, 그래서 내가 이 섬에서 쫓겨나게 되더라도, 골프장만은 안 만들었으면 해요."
굴업리 전 이장 서인수씨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22일 숙소인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서씨는 시찰 나온 인천시 공무원들을 안내해 섬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송영길 인천시장은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굴업도 개발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5월 "2014년까지 굴업도를 해양관광단지로 만들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2014년 인천에선 아시안게임이 열린다. 이미 섬 전체 토지의 98.5%를 매입한 CJ그룹은 14홀짜리 골프장, 150실 규모의 호텔, 주거용 콘도 30동, 요트클럽 등을 세울 계획이다.
굴업도는 '남아있는' 섬이다. 처음부터 서해의 다른 섬보다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섬은 아니었을 것이다. 뭍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하나 둘씩 관광지로 개발되고 어지러운 유흥업소가 들어서는 세월에서, 굴업도는 그저 한발 비켜서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멸종위기 동식물의 보금자리와 화산섬 본래의 지질환경이 보존됐다. 하지만 개발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굴업도는 더 이상 숨쉬는 자연사박물관으로 남아있지 못할 것이다. 자연환경에 앞서, 마을 공동체는 이미 붕괴되고 있었다. 꺼끌꺼끌한 목소리로 서씨가 말을 이었다.
"이 섬에 모두 아홉 집 살아요. 근데 가구수는 열 여섯이에요. 혹시 가구수대로 보상을 해줄까 싶어 멀쩡한 집이 이혼을 해서 숫자를 늘린 집도 있어요. 아홉 집 사는 마을에서 찬성 대 반대가 팔 대 팔이라니, 나 참… 요기 윗집이 내 처남넨데, 이젠 우리랑 말도 안 해요. 그 집은 개발에 찬성하거든요."
1923년 큰 해일이 이 섬을 덮쳐 많은 주민이 희생되기 전, 굴업도는 100여척의 민어잡이 배가 몰려 파시를 이루던 섬이었다. 하지만 이제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섬의 동쪽은 연평도가 바라보이는 산지로 된 공룡섬이고 거기서 목기미 해수욕장을 지나면 유일한 마을인 굴업리가 나온다. 이어서 서쪽으로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개머리 초원이다. 방목을 위해 사슴과 염소를 풀어놨다가 이제 이 짐승들의 야생 서식지가 돼버린 곳이다. 너른 초원의 테두리는 높이 100m에 이르는 해안 절벽이다. 불과 30여년 전까지 땅콩농사를 짓던 계단식 밭이었지만 이제 온갖 야생화를 피워내며 자연의 복원력을 알게 해주는 땅이다.
개머리 초원은 오지를 찾는 야영객이 꼭 가보고 싶어하는 곳으로 서해에서도 손꼽히는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수크렁이 지천인 초지와 절벽의 둥지를 차고 날아오르는 송골매를 어렵잖게 만날 수 있는 절경인데, 개발업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환상적인 골프장 입지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골프장을 만들고 잔디를 유지하려면 하루 2,000톤 이상의 물이 필요하다. 굴업도의 지하수로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결국 바닷물을 담수화해 잔디에 뿌려야 할 것이다. 또 농약을 살포하느라 굴업도의 땅과 바다는 오염을 피?수 없을 것이라는 게 환경단체의 주장이다.
'굴업도를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은 굴업도가 인공 리조트로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해 뭉친 이들이다. 하나같이 한번 이 섬에 와보곤 그 매력을 못 잊어 거푸 굴업도행 배를 타게 된 사람들이다. 소설가 이호철, 화가 김정헌, 사진작가 배병우, 연극인 박정자, 평론가 김화영, 출판인 이기웅, 건축가 김원 등등 200명이 넘는다. 22~23일 여행에는 시인 채호기, 출판인 이수용, 건축가 이윤하, 무용가 정유라, 첼리스트 최윤희씨 등이 동행했다. 채씨는 "개발 대상지 주민들은 환경운동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며 "우리는 투쟁이 아니라 문화를 통해 대화하는 길을 찾으려 한다"고 말했다.
이번 여행에는 보기 드문 이벤트가 있었다. 22일 굴업도의 명물인 코끼리 바위를 배경으로, 정씨와 최씨가 작은 공연을 마련했다. 바흐의 첼로곡과 힘찬 춤사위가 어울린 공연의 제목은 'Prelude for Peace(평화의 시작을 울리며)'. 습기를 먹어 한층 부드러워진 악기의 선율과 춤 동작에 따라 너울거리는 바닷빛의 천 너머, 잠깐 안개가 걷히며 굴업도의 곡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면, 아니 아마도 곧 중장비로 갈아엎어져 거친 표면으로 바뀔 선이다. 오래 담아두고 싶어 카메라를 대자 다시 뻑뻑한 안개가 밀려왔다. 굴업도는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채호기 시 '개머리초원'
(전략)
완만한 능선 우거진 풀들 사이로 길이 있다.
내딛을 때만 보였다 사라지는, 물 위의 발자국처럼
어느새 흔적 없는, 풀과 뒤엉켜 사라지는 길이 있다.
양 옆은 그 높이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생각이 끓고 있는 바다.
생각 넘어 생각의 끈을 놓아버린 망연한 바다.
멀리 바위 절벽에다 이빨을 드러내는 바다.
먼 바다를 항해하고 돌아오는 배 위에서
안개가 걷히는 이 섬 가까이로 서서히 접근할 때
개의 머리 형상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개머리초원,
사라진 길. 생각은 전혀 짖지 않는다.
두 눈은 초점 없이 먼 곳을 향하고 있을 뿐
콧등에서 미간까지 뭔가 움직이고 있어도
포갠 두 발 위에 머리를 얹고 있을 뿐.
(후략)
굴업도(인천)=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망원경과 등산화 필수" 굴업도 생태기행
굴업도에 갈 땐 선글라스와 비치샌들만 챙기지 말고 망원경(탐조용이면 더 좋다)과 등산화도 꼭 가방에 넣어야 한다. 이곳에서 물놀이만 하다 오는 건 손해다.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해수욕장이 세 곳 있지만, 네온사인 번쩍이는 여느 해변에선 꿈꾸기 힘든 생태 체험이 이 섬의 진짜 매력이기 때문이다. 멸종위기종 새와 곤충, 야생화된 사슴을 모두 만날 수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해식와(바닷물의 염분에 의해 깊고 좁게 침식된 지형)도 여기 있다. 자녀와 함께 온 피서객에겐 최고의 자연학습장인 셈이다.
인천항에서 출발해 덕적도에서 한번 갈아탄 배가 굴업도 간이 선착장에 닿을 때면 섬에서 세 대밖에 없는 트럭이 마중을 나온다. 트럭은 시멘트 포장도로를 5분 정도 달려 마을에 닿는다. 첫걸음부터 제대로 섬을 느끼고 싶다면, 짐만 적재함에 실어 보내고 옛 주민들이 이용하던 숲길을 걸어보자. 섬을 아끼는 사람들이 '굴업도 제1경'으로 꼽는 호젓한 오솔길이다. 완성된 수목 생태계인 극상림에서 주로 자란다는 서어나무와 소사나무 군락이 마을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터널처럼 감싸 푸른 아늑함을 준다.
두 나무 외에도 이팝, 팽, 만주고로쇠, 좀팽, 생강, 찰피, 동백, 으름, 보리수 등 다양한 나무들이 어울려 섬의 숲을 이룬다. 다른 건 몰라도 마른 이마에 드러난 핏줄 모양으로 휘어진 소사나무의 생김새는 익혀두고 찾아가자. '소사나무의 섬'이라고 할 정도로 굴업도엔 이 나무가 많이 자란다. 굴업리 동네에서는, 발길에 채는 풀이라도 뭍에선 보기 힘든 귀한 것들이다. 갯메꽃, 갯방풍, 해당화, 모래지치, 백선, 천남성 등의 야생화가 무리 지어 살고 있다. 그래서 산림청은 2009년 굴업도 전체를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의 대상 수상지로 선정하기도 했다.
마을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나면 할 일은 대략 세 갈래다. 바닷물에 몸을 담그거나, 섬의 동쪽으로 가벼운 산행을 가거나, 서쪽 개머리 초원을 오르는 일.
먼저 연평산과 덕물산이 있는 동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있는 목미기 해수욕장은 썰물 때면 양쪽의 바닷물이 만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늘고 긴 해변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꽤 둔덕져있다. 이 해변에선 살아 움직이는 사구를 볼 수 있는데, 쓸모 없어진 전봇대가 모래언덕을 옮기는 바닷바람의 힘을 재는 역할을 한다. 본래 땅 위로 10m가 넘었던 전봇대는 대부분 3분의 1 정도만 남기고 모래에 묻혔다. 사구가 가장 발달한 부분은 거의 사람 키만큼만 남았다. 굴업도 모래가 분가루처럼 곱기 때문에 가능한 사구의 이동 결과다.
그리 크지 않은 섬인데도 굴업도의 해안절벽은 동쪽과 서쪽이 사뭇 다른 모습이다. 서쪽이 파도에 바위가 깎여나간 절리(節理) 형태의 지형인데 비해, 동쪽은 화학약품으로 속을 녹여낸 듯 부드러운 침식 지형을 보여준다. 100m 조금 넘는 높이의 해안 언덕 양쪽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굴업도를 둘러싼 바다가 무척 깊기 때문이다. 주변보다 깊은 수심은 늘 안개를 만들어내고, 소금기 머금은 안개는 서쪽보다 바람이 약한 동쪽 해안에서 집중적인 침식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동남쪽 토끼섬의 해식와는 길이 120m나 되는, 소금이 만들어낸 국내 최장의 자연 터널이다.
이튿날, 마을 앞 큰말해수욕장에서 시작하는 개머리 초원에 올랐다. 굴업도의 본격적인 생태 체험 코스다. 이른 아침의 초원은 10m 앞을 보기 힘든 짙은 안개에 가려 있었다. 비에 젖은 것처럼 넉넉히 이슬을 머금은 풀이 발목을 감아 등산화 속은 금세 축축하게 젖었다. 방풍림같이 막아선 소사나무 장벽을 뚫고 언덕을 오르자 노란 물체가 눈 앞에 팔랑거렸다. 그때부터 동행한 이승기 한국녹색회 정책실장이 바빠졌다.
"이건 왕은점표범나비입니다.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이에요. 여기선 너무 흔해서 멸종위기란 게 실감이 안 나죠? 지금은 엉겅퀴 꽃이 필 때라서 얘들이 꿀을 빠느라 정신이 없을 때에요. 다음달 말쯤 되면 희귀식물인 금방망이 군락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이놈들이 거기 가서 놀 거에요. 굴업도에선 내륙보다 식물의 개화기가 3주 정도 늦은데…"
억새와 수크렁이 무성하게 자란 초원을 걷다가 물을 마시러 나온 듯한 사슴, 몸을 말리러 길로 나선 먹구렁이의 모습과 깜짝 마주쳤다. 놈들은 사람을 보자 곧 도망쳤는데 안개가 짙어 그 모습을 금방 놓쳐버리는 게 못내 아쉬웠다. 멋진 정지비행을 보여주는 매의 모습은 그나마 오래 지켜볼 수 있어 한참 발을 멈추게 했다. 미처 다 받아 적지 못할 정도의 꽃과 풀, 벌레의 이름을 이날 오전 들을 수 있었다. 그 많은 생명이 여기 모여 있다는 사실보다, 이곳이 불과 30년 전까지 인간의 경작지였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이 조그만 초원이 부디 그런 생명의 경이를 오래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랐다.
굴업도(인천)=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여행수첩/ 굴업도
굴업도에 가려면 덕적도를 거쳐야 한다. 우선 인천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덕적도로 가는 배를 탄다. 1시간 10분 걸린다. 평일엔 하루 두 차례(오전 9시30분, 오후 2시30분) 배가 뜨고, 주말에는 그 사이에 한두 차례 배가 더 있다. 휴가철인 8월 15일까지는 하루 최대 8차례까지 덕적도행 배가 운항한다. 날짜에 따라 출발 시간이 다르니 미리 확인해야 한다. 문의 고려고속훼리 1577-2891.
덕적도에서 굴업도로 들어가는 배는 하루 한 차례(오전 11시) 있다. 홀수 날은 문갑-굴업-백아-울도-지도 순으로 다섯 섬을 들른 뒤 덕적도로 되돌아오고, 짝수 날은 반대 방향으로 돈다. 그래서 굴업도까지 1시간 만에 갈 때도 있고 3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시간은 날씨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문의 에이치엘해운 (032)888-8901.
굴업도엔 주민들이 운영하는 민박집이 있다. 굴업도민박 (032)832-7100, 고씨네민박 (032)832-2820, 굴업민박 (032)831-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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