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의 민주당 대표실 도청 의혹이 불거진 지 한 달이 지났다.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의혹 역시 가시지 않았다. 지난달 24일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이 KBS 수신료 문제와 관련 민주당 최고의원 비공개회의 녹취록을 공개하면서 불거진 도청 파문에 연루된 KBS 정치부 말진 장모 기자가 현재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장 기자가 당초 용의자 신분에서 피의자로 바뀐 것처럼 의혹은 점점 짙어지는 형국이다.
신뢰가 생명인 언론사, 그것도 도덕적 엄격함이 더 요구되는 공영방송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KBS 경영진은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진작에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진실을 밝히고 파문 확산을 막았을 터. 하지만 KBS는 진상조사에 나서기는커녕 안팎의 비판 여론에 눈감은 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뭔가 구린 게 있는 게 아니겠냐'는 세간의 추측이 날로 몸을 불리도록 부추기는 꼴이다.
공영방송이 도청 의혹에 휘말리는 초유의 사태로 만신창이가 되어가는데도 KBS 경영진이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KBS가 그간 내놓은 공식 입장이라곤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고 대응하겠다"는 말을 되풀이 하며 간간이 '비겁한 변명'만 늘어놓는 게 전부다. 그것도 책임을 져야 할 경영진이 아닌 홍보실과 보도본부, 그리고 이제 입사 4년차인 장 기자의 입을 통해서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도청은 없었다"(6월 30일), "(녹취록 확보에) 제3자의 도움이 있었지만 취재원 보호를 위해 밝힐 수 없다"(7월 11일)는 등의 해명은 말장난에 가깝다. 더욱이 장 기자는 경찰이 증거확보를 위해 집을 압수수색하자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분실했다"고 했다. KBS 안에서조차 이런 식의 대응이 의혹을 키운다는 비판이 나오는데, 국민이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25일 전날 사측이 "KBS는 특정 기자와 관련된 근거 없는 의혹이 조속히 해소될 것으로 믿는다"고 밝힌 것에 대해 회사의 문제를 일개 기자에게 뒤집어 씌우며 선 긋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KBS 역사상 이렇게 비겁하고 무능했던 사장과 경영진이 있었는지 한 번 따져보고 싶다"고 개탄했다.
만약 KBS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면 이 답답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딱 하나다. 김인규 사장이 직접 나서 "사장직을 걸고 맹세컨대 KBS는 도청을 하지 않았다"고 떳떳하게 밝히는 것이다. 이 엄중한 시기에 김 사장은 한가롭게 일본에서 열린 '뮤직뱅크' 녹화현장에 동행(12~14일)하고 직원가족 수영대회(22일)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결국 KBS 기자들이 "더 이상은 굴욕을 못 참겠다"고 집단행동에 나섰다. 2000년 이후 입사한 기자 166명은 지난 21일 성명에서 "도청 의혹 사건에 대해 지금까지 KBS가 내놓은 해명은 참으로 옹색함을 넘어 어처구니 없을 정도"라고 탄식하며 김인규 사장과 고대영 보도본부장에게 직책을 걸고 도청 여부에 관해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29기 이하 PD 148명도 25일 성명을 내 김 사장의 답변을 촉구하고 나섰다.
의혹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을 경우 KBS는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30년 묵은 숙원인 수신료 인상은커녕 수신료 납부 거부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을 정도로 여론은 험악하다. 시간이 얼마 없다. 그리고 이런 식의 대응이라면 KBS의 미래도 없다.
채지은 문화부 기자 cje@hk.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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