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리플래닛/피터 멘젤 등 지음·김승진 등 옮김/월북 발행·592쪽·2만5,000원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 자체이다(We are what we eat)'는 서양 속담이 있다. 음식에는 우리의 생활양식뿐 아니라 문화, 생각까지 담겨 있다는 뜻이다. 사는 곳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식재료의 종류와 양이 다르고, 그것을 조리하는 방법이 다르다. 육고기나 생선, 채소나 과일 등 비슷한 재료라도 거기에 부여하는 의미는 또 문화권마다 상이하다. 어쩌면 의식주 가운데서도 가장 본질적인 문화적 차이를 드러내주는 것은 음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사진작가 피터 멘젤과 방송작가 페이스 달뤼시오 부부는 <칼로리 플래닛> 을 통해 우리가 먹는 음식은 단순히 지역별 문화 차이 이상의 것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글 많은 다큐멘터리 사진집이라고 해야 할지, 여행서라고 해야 할지 딱히 분류하기 힘든 이 책에는 30개 나라 80명의 어느 날 하루치 식단 사진이 총열량(사진을 갖고 뒤에 계산한)이 붙은 식단 안내표와 함께 실려 있다. 그리고 이 식단을 아프리카 케냐의 마사이족에서 영국의 30대 여성까지 열량이 많아지는 순서대로 배열했다. 칼로리>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일일 여성 권장열량은 2,200㎉이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식단은 800㎉로 시작해 1만2,300㎉로 끝난다. 음식문화가 다른 것은 물론이고 세계가 지금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편집을 통해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케냐의 반유목민 마사이족 추장의 세 번째 부인 눌키사루니 타라콰이(38)의 하루 식사는 옥수수가루로 만든 진한 죽인 우갈리 400g, 바나나 한 개(26g), 우유와 설탕이 조금 들어간 홍차 두 잔(350㎖)이다. 원조단체가 만들어 준 물 저장소에서 길어온 물 2리터를 끓여 마시지만 이건 열량이 없다. 이래서 하루 섭취 열량이 800㎉다.
사하라 사막 이남 보츠와나 여성 마블 모아히(32)는 에이즈 환자다. 에이즈로 숨진 언니의 자녀인 조카들과 함께 4인 가족은 정부가 에이즈 고아들에게 제공하는 배급 식품으로 연명한다. 14세인 조카 1인분으로 배급 받는 콩, 곡식, 고기통조림, 식용유, 설탕, 사과를 나눠 먹는 것이다. 모토고라는 곡식죽, 마돔비라는 밀가루 만두를 주식으로 하루 900㎉를 섭취한다. 여기에 물론 열량은 전혀 없는 에이즈 치료약 몇 알도 추가된다.
하루 1,400㎉를 섭취하는 방글라데시 다카의 12세 소년 알라민 하산은 원래 고향이 북부지방이었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가 생겨 가족을 버리고 떠나자 더 이상 생계를 책임지기 어려워진 엄마는 그에게 집을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돈벌이를 위해 무작정 떠나온 곳이 수도 다카다. 역 플랫폼에서 잠을 자며 승객의 짐을 날라 주고 버는 돈은 하류 평균 1달러 안팎이다.
정반대 지점에 1만2,300㎉의 과도한 열량을 섭취하는 병적인 상태의 영국 여성 질 맥티그(31)가 있다. 그는 과다 열량 섭취자에게 흔한 필사적인 다이어트의 경험도 가졌다. 중독이 될 정도로 각성제를 먹어 가며 살을 뺐지만 먹을 것을 보면 참을 수 없다. 그렇게 쪘다 뺐다를 반복했다.
저자들이 식단과 80명의 생활 묘사를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맥티그 같은 사람이 뭔가 특별히 나쁘다는 게 아니다. 책에 소개된 아프리카나 동남아 빈국 사람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냥 지금 세계는 독자들이 사진으로 보고 실감하는 것처럼 그렇다는 것이다. 내전과 자연재해로 음식의 절대량이 부족한 한편에서 온갖 종류의 가공식품이 넘쳐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사실 책에서는 이 같은 극과 극의 사례보다는 중간 지대(다수가 2,000~4,000㎉다)의 음식 풍경이 더 다양하게 등장한다. 1년에 절반만 일하고 나머지는 인터넷카페에 틀어 박혀 하루 두 끼 식사를 배달 시켜 먹으며 온라인게임에 몰두하는 중국의 쉬즈펑, 이라크 전쟁에 참전해 중상을 입고 재활치료 중인 미국의 펠리페 애덤스는 먹는 모습이 사는 모습만큼 백인백색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들이 의도했는지 모르겠으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이 3,000㎉ 정도로 비슷한 열량을 섭취해 나란히 배열된 것도 눈길이 간다.
책을 덮으며 이 다양한 세계의 음식 사정에 대해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지나가기란 힘들 것이다. 마사이족 사람들이 키우던 소를 도축한 뒤 위에서 비닐봉지를 꺼내는 장면을 묘사하며 저자들이 '현대 세계의 폐기물이 마사이족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대목을 읽을 때는 더욱 그렇다. 덧붙인 글에서 미국을 예로 들어 "지금의 식사 1인분은 과거보다 2배에서 5배까지 커졌다"며 식품제조회사들이 이 같은 '1인분의 왜곡'을 조장하고 있다는 영영학 전문가의 지적도 경청할만하다.
이 책에는 중국과 일본 사례는 있지만 한국은 없다. 굳이 한국이 아니더라도 배급량 기준으로 주민 하루 열량이 525㎉라는 북한 사정쯤은 저자들의 관심을 끌만도 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취재하기가 어려웠던 걸까.
저자들은 앞서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 여러 나라의 한 가족 소유물을 보여주는 <물질 세계> , 한 가정의 일주일치 식사를 늘어놓고 보여주는 <헝그리 플래닛> 등 비슷한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헝그리> 물질>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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