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박모씨는 2007년 남모(41)씨를 처음 만났다. 재벌2세이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과의 친분을 과시하던 남씨는 박씨에게 재벌 총수들과의 만남을 주선해주겠다고 접근했다.
그러나 남씨는 재벌가(家)를 사칭하는 전문 사기단 중 한 명이었다. 이건희 회장뿐 아니라 강동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 등을 거론하며 박씨 등으로부터 수억원을 가로챘다. 박씨는 "억대 외제차를 타고, 주변에서 남씨를 '작은 회장님'이라고 불러 철석같이 믿었다"고 했다. 박씨가 남씨에게 잃은 돈은 3년간 총 5억6,000여만원. 서울중앙지법 형사29부(부장 배준현)는 이달 초 남씨에 대해 사기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했지만 박씨는 전 재산을 잃고, 생계마저 걱정하는 신세가 됐다.
청와대, 국회의원 등 권력층을 사칭한 사기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터무니없어 보이는 거짓말에 왜 사람들은 쉽게 속아 넘어갈까.
전문가들은 일단 철저하게 계획된 사기 수법, 권력층의 힘을 맹신하는 문화 특성, 비정상적인 방법이라도 한 몫 챙겨보겠다는 일확천금의 욕망이 작용해 사기범행이 의외로 쉽게 성공한다고 진단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사기사건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사기ㆍ공갈 혐의로 기소된 사건은 연평균 2만9,913건으로 도로교통법 위반(2만3,291건)보다도 많다.
이와 관련, 법원 관계자는 "서구사회와 달리 한국사회에선 일단 상대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계약서 등을 써달라고 하면 오히려 '왜 날 못 믿느냐'고 화를 내고, 요구하는 사람이 잘못한 것처럼 된다"고 분석했다. 의심이 들어도 차후에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등의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 결국 사기를 당한 걸 알고 나서야 법에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서구에서는 철저히 서류와 법 절차에 따르지만 한국은 신용이라는 명목 하에 믿고 맡기는 식이다. 결국 권력 사칭 범죄는 유난히 비율이 높은 사기 관련 고소 고발 사건의 원인과 맥을 같이한다"고 분석했다.
피해자들의 욕심도 또 다른 원인이다. 최근 이상득 국회의원 보좌관을 사칭한 사기범에게 5,000만원을 날린 서모씨는 "인천공항 대합실에 있는 부스 영업권을 준다니까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뭐든 할 수 있는 힘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역시 한 몫을 차지한다. 최근 박주선 국회의원의 친척을 사칭해 사업에 필요한 담보대출을 받아주겠다며 접근한 사기범에게 1,500만원을 날린 A씨는 "국회의원이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고 말했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법무부 차관을 사칭하며 고속도로 휴게소를 임대해주겠다고 한 사기범에게 수십억원을 뜯긴 한 사업가는 정교한 사기 수법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과의 친분 등을 내세운 데다, 전문가 뺨치는 연기력과 눈으로는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정교하게 만든 가짜 계약서 등을 보고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피해자들 중에는 사기라는 낌새를 챈 후에도 어쩔 수 없이 계속 돈을 주기도 한다. 대통령 친형인 이상득 의원과 친하다고 접근한 사기범에서 3,000여만원을 줬던 김모씨는 "중간에 사기라는 걸 알았지만, 추가로 돈을 더 내야 처음 투자했던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10차례나 돈을 줘야 했다"고 진술했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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