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80)이 19일 영국 하원에서 열린 전화 도청(해킹) 의혹 청문회에 섰다. 아들 제임스 머독(38), 머독의 다섯번째 딸로 불리는 레베카 브룩스(43)까지 '머독 제국' 3인방이 한자리에 나와 증언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이, 머독 계열 타블로이드 뉴스오브더월드(NoW)가 살해된 13세 소녀의 휴대전화를 도청했다고 폭로한 지 보름 만이다. 감청색 양복과 넥타이를 나란히 하고 청문회에 함께 참석한 머독 부자는 충분한 사전 준비를 한 듯 차분한 모습을 유지한 채, 예민한 질문에는 '모른다' 또는 '아니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이날 청문회는 CNN 등 주요 언론들에 의해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머리 숙인 미디어 재벌
머독은 "오늘은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운 날"이라며 "(이번 사건으로)충격을 받았고, 수치스러웠으며, 소름이 끼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책임이 없다"면서 "도청 의혹에 고의적으로 눈 갚은 잘못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9ㆍ11사태 희생자를 도청했다는 의혹도 증거가 없다"며 부인했다. 의원들은 머독 계열 언론이 '산업적 규모'로 전화 도청을 했고 경찰을 불법 매수했으며 언론 비위를 맞추려는 정치인을 이용해 민주적 절차를 호도했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도청 취재 및 취재원 매수 의혹에 반성한다고 머리를 숙였지만, 불법 관행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꼬리를 잘랐다.
3인방 겨냥하는 의혹들
도청 파문 이후 불법도청 가담 기자 등 10명이 체포됐고 런던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 2명, 총리 공보책임자 등이 사직했다. 정치권과 언론은 이제 머독 3인방을 직접 겨냥하며 이들이 도청 사실을 사전 인지했을 것이란 의혹을 키우고 있다. 일례로 2008년 스포츠계 인사 고든 데일리와 시사평론가 맥스 클리포드의 통화를 도청했다가 문제가 되자 돈으로 무마하는 과정에서 불법 관행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3인은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2005년 왕실인사도청 파문 이후 지금까지 2008년을 제외하고 매년 한 두 차례 비슷한 사건이 반복됐다는 점도 머독 측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현재 런던경찰은 도청대상이 4,000여건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3인방 각자도생하나
블룸버그 통신은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으면 머독이 소유 언론사들의 모회사 격인 뉴스코퍼레이션(뉴스코프)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뉴스코프 측은 부인하고 있으나, 비난 여론을 잠재우려면 의혹의 최종 책임자인 머독이 경영에서 손을 떼는 게 필요한 상황이다. 후임에는 최고운영책임자(COO) 체이스 캐리가 물망에 오르고 있다. 유력한 후계자이던 아들 제임스는 이번 사태의 최대 피해자가 될 처지에 놓여 있다. NoW 편집장 출신으로 뉴스인터내셔널 CEO를 지낸 브룩스는 "나는 가담자가 아니라 희생자"라는 입장이다. 머독도 이날 "나는 오도 당했다"고 책임을 미뤘다. 이해관계가 미묘하게 얽힌 3인의 공조가 깨지면 파문은 걷잡기 힘들어진다.
캐머런 총리는 안전할까
전화도청 파문은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까지 위태롭게 만들었다. 캐머런 총리는 2007년 왕실 인사 전화도청 책임을 지고 NoW 편집장을 물러난 앤디 쿨슨을 작년 5월 총리 공보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는 이번 파문 와중에 레베카 브룩스와 수 차례 회동하기도 했다. 문제 언론 또는 언론인들과 유착 의혹이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까닭이다. 총리 사퇴까지는 아니지만 이라크 전쟁에 발목이 잡혔던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도청 폭로한 전 기자 의문의 죽음
도청 의혹을 폭로한 전 NoW 기자 션 호어가 청문회를 앞둔 18일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고 해킹집단 룰즈섹이 머독 계열 더선(The Sun)의 웹사이트를 해킹하는 등 영국은 어수선한 '도청정국'이 계속됐다. 호어는 도청 행위가 광범위하게 자행됐고 앤디 쿨슨이 편집장 시절 해킹을 독려했다고 폭로해 이번 파문을 키운 주인공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가 사건 확산에 따른 부담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타살 정황은 없다고 밝혔다.
한편, 머독 계열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8일자 사설에서 "언론들은, 의회와 검찰이 기자의 뉴스 수집을 통제하기를 진정 원하는가"라며 비판 언론에 반격에 가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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