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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을린 사랑', 직시하라… 아무리 잔혹한 진실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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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을린 사랑', 직시하라… 아무리 잔혹한 진실이라도

입력
2011.07.18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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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에 넣지 말고 나체로 기도문 없이 묻어주세요. 세상을 등질 수 있도록 엎어놔 주세요. 비석을 놓지 말고 이름도 새기지 마세요." 건강하던 어머니가 급작스레 쓰러지더니 유언마저도 느닷없다. 세상의 갖은 업을 쌓은 듯 그녀의 당부들은 서글픈 단조의 리듬을 타고 있다. 게다가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 "아버지와 형에게 편지가 모두 전달되면 비석을 세우고 내 이름을 새겨도 된다."

자신들이 세상과 만나기 전 삶을 마감한 것으로 알던 아버지와 존재조차 몰랐던 장남을 만나라니. 중동계 캐나다인 잔느와 시몽은 문득 그들에게 떨어진 인생의 고차방정식 앞에서 당황한다. 시몽은 죽음을 앞두고 이성을 잃은 어머니의 허튼 유언으로 치부하나 잔느는 어머니의 마지막 당부를 외면할 수 없다. 어머니 나왈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중동의 한 나라를 찾아 베일 속에 가려진 가계를 들춘다.

'그을린 사랑'은 놀라운 영화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내용만으로도 관객들의 시선을 스크린에 붙들어 맬 만하다. 영화 종반부에 드러나는 반전은 아마 '식스센스'나 '올드보이'급은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반전에만 목을 맨 영화는 아니다. 진폭이 큰 드라마로 갖은 비극을 잉태한 현대사의 여러 분쟁들을 비판한다.

잔느가 추적하는 어머니 나왈의 과거는 경악할 일들로 점철돼 있다. 어머니 나라의 아름다운 풍광 뒤에 숨겨진 잔인한 역사의 현장을 잔느와 함께 순례하면서 관객의 솜털은 조금씩 일어선다. 나왈은 사랑했던 이교도 난민 청년을 오빠의 총탄에 잃은 뒤 그의 아이를 낳지만 또 다른 명예살인이 두려워 아이를 바로 고아원으로 보낸다. 종교를 앞세워 권력을 다투는 정치집단에 대한 증오심은 나왈을 암살범으로 만들고, 형무소에서 그는 끔찍한 고문들과 직면하게 된다.

숨통을 죄는 영상들이 줄을 잇는다. 성모 마리아 사진을 붙인 소총으로 무장한 어느 민병대가 민간인 버스를 상대로 펼치는 살육극, 소년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탄을 날리는 저격수의 모습 등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끔찍한 과거를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바라보라고 권한다. 나왈이 남들이라면 꽁꽁 감추었을 가족사를 잔느와 시몽에게 고스란히 알리려 했던 것처럼. 영화는 이렇게 주장하는 듯하다. "어떤 상처라도 숨기려 하지 말고 서로 알고 공유하라. 그래야 치유법도 찾을 수 있고 악순환도 막을 수 있다."

염세적인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영화는 밝은 미래를 이야기 하려 한다. 나왈이 가족의 비밀을 안 다음에 읽으라고 자녀들에게 남긴 편지들은 "함께 한 순간의 행복"을 강조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내가 이 작품에 끌린 이유는 냉소가 아닌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원제는 'Incendies'로 극작가 와이디 무아와드의 동명 연극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빌뇌브 감독은 "거의 4시간짜리 연극이었는데 공연을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깊이 몰입했다. 공연이 끝난 뒤 다른 관객들과 함께 오랫동안 기립박수를 치면서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적지 않은 관객들이 빌뇌브가 겪었던 몰입의 순간과 마주치게 될 듯하다. 21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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