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스(SARSㆍ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가 유행하던 2003년의 일이다.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는 상태에서 세계 곳곳으로 급속하게 전파된 사스로 인해 야단법석이 났을 때다.
이런 괴질이 퍼지는 것을 차단하는 유일한 방법은 격리이기 때문에 인천공항을 비롯한 국제공항에서는 사스 유행 지역을 다녀온 의심 증상 여행객을 찾아내느라 검역 비상이 걸렸다. 발열 증세나 기침을 하는 여행객은 의심 환자로 분류돼 일정 기간 격리됐다.
언제나 그렇듯 유별난 사람은 있기 마련. 양성 반응을 보인 한 내국인이 생업을 이유로 당국의 자가(自家) 격리 권고를 무시하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국립보건원이 경찰력까지 동원해 강제 격리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제는 당시 사스같은 해외 유입 질환의 경우 관련 당국이 의심 환자를 강제 격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는 점. 미국 등 세계 각국은 사태의 심각성에 따라 강제 격리에 나섰지만 우리는 법 개정 사항임에도 당국이 절차를 무시하고 초법적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당시 김문식 국립보건원장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할 수 밖에 없다. 책임을 지겠다"며 밀어붙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돌이켜봐도 법에 따라 움직이는 공무원으로서 쉽게 할 수 있는 조치는 아니었다. 논란의 소지는 컸지만 냉정한 판단과 과감한 행동 덕인지 동아시아에서 한국만 유일하게 환자가 나오지 않았다. 반면 사스 환자 정보 공개 및 대응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중국 당국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신뢰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새삼 옛 일을 떠올리는 것은 지난 5일 36층 높이 테크노마트 사무동 상층부에서 발생한 이상 진동 때문이다. 입주자들이 오전 10시 10분께 빌딩 상하 흔들림에 놀라 당국에 신고하고 나서 해당 구청이 3일간의 퇴거 명령을 내린 게 4시간 뒤다. 이 과정에 퇴거 범위가 분명하지 않아 인접 판매동 입주자들이 우왕좌왕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당국은 긴급 안전점검에서 이상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30여 시간 만에 퇴거 해제를 발표했다. 결정 과정이나 실행 조치가 신속하지도, 명료하지도 않아 어설프다는 느낌이 적지 않았다. 더욱이 원인 규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기 해제돼 불안감은 여전하다.
징후라는 것은 여러 해석이 가능한 현상이기에 잠재된 위험의 정도를 바로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상황 판단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입주자의 재산 손실 등 고려해야 할 점도 많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과 위험성의 정도를 따져볼 때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는 자명하다. 그 어떤 것도 시민의 생명과 안전 앞에 있지 않다. 테크노마트는 3,000여명의 입주자와 하루 수 만명에 달하는 유동 인구가 있는 있는 초대형 빌딩이다. 4시간 동안 빚어진 혼란은 민관 모두 위험 징후에 어떤 행동을 취할 지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삼풍백화점도 붕괴 한달 전 진동과 이상 소음이 들렸고 수 일전에는 천장이 갈라지는 징후가 나타났지만 이익에 눈이 어두운 기업 논리에 묻히고 말았다. 500여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를 겪었지만 서울시는 정작 이러한 위험 징후 시 구체적인 조치 매뉴얼을 갖고 있지 않다. 재난 발생 시 조치 지침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과잉이 될 지언정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조치가 어설픈 판단으로 재앙을 맞는 것보다는 낫다. 일이 벌어진 뒤 비상사태를 선포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정진황 사회부 차장 jhchu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