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놀라움 덩어리다. 무심히 지나치던 들풀이나 곤충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경이롭다. 그칠 줄 모르는 비로 상추나 배추 등 재배식물이 된서리라도 맞은 듯 녹아나가 농민과 서민의 한숨을 자아내지만, 사람의 보살핌을 받은 적 없는 잡초는 숨 쉬기도 힘든 폭우조차 즐기는 듯하다. 개중에서도 덩굴식물의 생명력은 유난하다. 스스로 제 줄기에 힘을 붙인 후 그에 의존해 자라는 대신 아무데나 기대어 타고 오르는 독특한 생장 방식으로 절약한 에너지를 성장에 집중 투입해 무섭게 자라난다.
■ 나팔꽃을 비롯한 많은 덩굴식물은 물체를 감으며 타고 오른다. 감을 물체가 가까이 있지 않으면 덩굴 끝을 여러 차례 잡아 돌리는 시행착오 끝에 가까스로 감을 것을 찾는다. 속도 차는 크지만, 카우보이가 올가미를 돌리다가 던지는 듯하다. 담쟁이는 이런 힘든 일을 화학기술로 대체했다. 줄기 곳곳에 잎과 반대쪽으로 돋는 대여섯 갈래의 흡착뿌리 끝에서 분비되는 점액이 말라붙은 힘으로 매끄러운 표면에도 쉽게 달라 붙는다. 절약한 에너지를 덩굴과 잎을 늘리는 데 쓸 수 있고, 그 결과 더 많은 태양에너지를 고정하는 확대 재생산에 들어간다.
■ 올 봄 담쟁이에 대한 놀라움이 늘었다. 많은 덩굴식물이 잎을 떨구고 덩굴가지에서 물을 뺀 채 월동을 한다. 봄에 새싹을 틔울 때 뿌리에서 멀리 떨어진 가는 덩굴가지는 적잖이 포기하지만 담쟁이는 끊어지지만 않았다면 겨우내 죽어 있던 덩굴가지를 말단까지 거의 그대로 되살려 쓴다. 하나하나로는 대단치 않은 흡착뿌리의 약한 힘이 무수히 모여 긴 덩굴을 담벽에 붙이는 데서도 알 수 있지만, 중심에서 말단까지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있는 무서운 조직체를 연상시킨다. 그런 단결력이 다른 경쟁자에 한 발 앞서 도시의 벽면을 차지한 비결이다.
■ 담쟁이도 약점은 있다. 우선 물이다. 자동차전용도로 방음벽을 덮었던 담쟁이 덩굴이 오랜 비에 곳곳에서 떨어져 내렸다. 워낙 무성히 엉켰던 까닭에 태풍에 뒤집힌 초가집 이엉처럼 길고 두텁게 일어나 무너졌다. 물의 접착력 감쇄 효과를 담쟁이가 모를 리 없다. 진정한 적은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싹텄을 자만과 과신이다. 도시의 담벽을 독차지한 담쟁이가 성공에 취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담쟁이 사태(沙汰)다. 흡착뿌리가 물에 젖어 접착력이 떨어지고, 덩굴과 잎이 잔뜩 물에 젖었더라도 적당히 번성했다면 이리 헛되이 무너졌을까.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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