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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연변 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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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연변 제비

입력
2011.07.0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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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동북아역사재단의 답사 여행단에 끼여 처음 돌아본 연변자치주 일대는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중국어와 병기된 한글 간판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딜 가나 풀과 나무 등 식생이 우리나라와 흡사했다. 농촌 마을에 밤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고, 길가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망초, 명아주, 소루쟁이, 환삼덩쿨, 쇠뜨기 등이 무성했다. 옥수수 밭이 끝없이 이어지는 평원지대는 이게 바로 만주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지만 한참 벼가 자라는 다락논 지역을 지날 때는 마치 강원도를 여행하는 느낌이 들었다.

■ 무엇보다 반가웠던 건 제비였다. 우리 농촌에는 제비 개체 수가 급감하고 있지만 연변 지역은 도심에서도 쉽게 제비를 볼 수 있었다. 압록강 변의 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할 때는 제비들이 지저귀며 날아다녀 어린 시절 고향마을을 떠올리게 했다. 문득 연변의 제비가 우리 민족의 간도 개척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더욱 각별하게 여겨졌다. 제비가 여름철 벼농사를 짓는 곳에 날아와 번식하는 철새이고 보면 19세기 중반부터 우리 선조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가 벼농사를 지으면서 제비들도 함께 따라갔을 개연성이 높다.

■ 연변자치주 일대는 1677년 청나라 강희제가 여진족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령(封禁令)을 내린 이후 200년 이상 사람이 살지 않은 대수림지대로 남았다. 그러다 19세기 중반부터 대흉년 기근에 시달린 조선 유민이 넘나들며 한철 농사를 지었고, 1877년 처음 용정 지역에 함경, 평안도에서 온 14세대가 정착한 게 간도 개척의 시작이었다. 청 조정은 처음엔 조선유민의 정착을 막았으나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고 변경 개발을 위해 근면한 조선 개간민을 적극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 유민들의 벼농사는 만주 지역 전체로 벼농사가 퍼져나갔다.

■ 일제 강점기에는 억압을 피한 이주자와 독립운동가들이 몰려들었고, 1930년대 후반 만주 개척을 위한 일제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만주 유입 조선족이 대폭 늘었다. 이들이 오늘 중국 동북 3성 조선족의 뿌리다. 그러나 근래 만주 조선족의 핵심인 벼농사 농민이 급감하고 있다고 한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취업과 결혼 등으로 남한 체류 동포가 늘었고, 중국 내에서도 도시로 이농하는 조선족이 많은 탓이다. 그래서 연변자치주 등 동북 3성 조선족 사회의 약화나 붕괴를 우려하는 견해도 나온다. 연변 하늘을 날렵하게 날던 제비를 마음 편하게만 바라볼 수 없었던 이유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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