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서오텔레콤 대표는 '동반성장', '대기업'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를 친다. 대기업에 뺏긴 특허기술을 되찾기까지 3년 여의 시간이 걸렸다. 선임한 변호사 사무실만 11곳, 70억원이 넘는 소송비용을 대느라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있던 5층짜리 사옥까지 팔아야 했다.
김 대표는 휴대폰 비상버튼을 누르면 미리 입력된 경찰서나 가족의 번호로 전화를 거는 '이머전시 콜' 기술을 개발, 2001년 특허를 받았다. 2003년 상용화를 위해 찾아간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 관계자는 "검토를 해봐야 한다"며 김 대표에게 기술자료 전체를 달라고 했다. LG와 제휴하려고 몸이 달았던 그는 의심 없이 자료를 넘겼다. 며칠 뒤 LG는 "상용화하기에 너무 앞선 기술"이라며 퇴짜를 놓았다. 1년 후 신문을 보던 김 대표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특허기술이 적용된 LG텔레콤의 '알라딘폰' 광고가 버젓이 실려있었기 때문이다.
법을 잘 알지 못하는 중소기업의 허점을 노려 기술을 빼앗는 대기업도 많다.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A사는 대기업 B사가 공동개발을 갑자기 중단하고 자신의 핵심기술을 이용해 신제품을 내놨지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A사 관계자는 "기술자료 사용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아 기술탈취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동반성장을 외치는 MB정부에서도 대기업에 부당하게 기술을 빼앗기는 중소기업이 적지 않다. 최근 중소기업청이 대기업에 물건을 납품하는 협력업체 2,000개를 조사한 결과, 22.1%가 대기업으로부터 기술자료 제공 요구를 받았으며, 이 중 80%는 거래 단절 등 보복이 두려워 자료를 제출했다고 답했다. 중기청은 "조사대상 2,000개 업체 중 약 90%가 응답을 거부했다"며 "입을 다물고는 있지만 훨씬 더 많은 업체들이 자료제공 압박을 받고 자료를 건넬 것"이라고 말했다.
부당함을 참지 못해 소송을 내더라도 승소하기는 쉽지 않다. 김 대표는 "유명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어 결국 패소하거나 판결이 나올 때까지 경영난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실제 휴대폰 폴더를 자동으로 열고 닫는 '오토폴더' 기술을 개발한 벤처기업 슈버는 삼성전자와의 특허권 분쟁에서 4년 만에 이겼지만 부도가 났다. 이 회사는 삼성전자가 납품을 받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거래를 끊고 납품업체를 계열사인 삼성전기로 바꾸자 2001년 말 소송을 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의 기술탈취를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7일 기술자료 제공 요구ㆍ유용행위 심사지침을 제정, 시행하기로 했다. 지침은 기술자료의 범위를 특허권, 시공매뉴얼, 설계도면, 생산원가내역서 등 지식재산권부터 경영 정보까지 폭넓게 규정했다.
또한 비밀유지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기술자료를 요구하거나 기술이전계약 종료 후 제3자를 통해 제품을 상용화하는 등 부당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중소기업 관계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지침을 활용해 기술자료를 요구할 때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는지, 비밀유지나 기술이전계약을 체결하는지 등 이행 상태를 집중 점검하겠다"고 말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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