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
시커먼 얼굴의 남성들이 35m 크레인 중간 계단에 일렬로 서서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다. 맨 꼭대기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던 중년 여성은 손짓으로 화답하며 잠시 웃는 듯했지만 이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맙소. 우리 살아서 내려갑시다.' 여성의 입가에서 맴돌던 이 두 마디는 이내 가슴 속 깊이 숨어버렸다.
지난 1월6일,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7일 52번째 생일을 맞았다. 노래를 부른 이들은 크레인 중간 계단을 점거한 채 농성 중인 6명의 조합원들. 그들은 한진중공업 사측과 노조 집행부가 지난달 27일 노사 합의서에 서명한 직후부터 김씨와의 '동거'를 선택했다.
"그저 이 어둠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 평생 서너 번도 못 챙긴 생일이 대수인가." 그러나 김씨의 올해 생일은 전과 달랐다. 아침엔 미역국이 놓인 상도 받았다. 조선소 밖에서 끓여 35m 위로 배달되는 동안 식어버려 온기가 없었지만, 그릇의 절반을 비웠다. 김씨는 "속이 아파 제대로 먹지 못해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사측 용역들이 막는 바람에 의사가 크레인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고 씩씩거렸다.
6개월 간 35m 높이 크레인에서 홀로 버틴 여성의 목소리치곤 까랑까랑했다. 전화 인터뷰 초기 힘든 티를 내지 않던 김씨는 "잠을 어떻게 자느냐"는 질문을 듣고부터 볼멘소리로 변했다.
그는 "크레인에 공급되던 전기가 끊겨 너무 추워서 잠을 못 자고 있다"며 "6월27일 전에는 노조원 도움을 받아 물을 끓여다 썼지만 이젠 이마저 끊겼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매일 작은 페트병 크기의 물만 전달받고 있는데, 대부분 양말 등 옷을 적셔 빠는 데 쓰고 있다.
김씨가 6개월째 생활하는 크레인 꼭대기는 조정실과 동력실로 나뉘어 있다. 그는 "예닐곱 걸음 만에 두 방을 왔다갔다할 수 있는데 난간이 무척 불안하게 만들어져 밤에 이동하다 떨어질까 겁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정리해고가 철회되기 전에는 결코 내려 올 마음이 없다고 강조했다. 강제 진압을 한다면 투신하는 것 말고 방법이 있겠냐고 했다.
그가 단식 투쟁이나 거리 집회가 아닌 크레인 농성을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김씨에 따르면 2003년 함께 사측을 상대로 파업을 벌이던 김주익 당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129일 동안 고공농성을 하다 목을 매 숨진 곳이 바로 85호 크레인이기 때문이다. 18세부터 옷 공장 등에서 노동자의 길로 들어선 그는, 21세에 대한조선공사(옛 한진중공업)에서 용접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입사 5년 만인 1986년'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해고당했다. 당시 함께 해고된 노동자들이 20년 넘게 벌인 복직 투쟁으로 회사로 돌아갔을 때도 김씨만 복직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 사이 징역살이만 두 번 했고 수배생활로 5년을 보냈다. 김씨는 지난달 '7회 박종철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살아서 내려가고 싶다. 내려가자마자 농성 중 구속된 조합원 김수영씨의 면회를 간 다음, 곧장 목욕탕에 가고 싶다." 그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실렸다.
강성명기자 sm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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