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총장이 사표를 던지며 입에 올린'팍타 순트 세르반다'가 여기저기서 화제다. 라틴어로 Pacta sunt servanda, '계약(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로마 법언(法諺)은 현대 민법의 기본원칙인 계약자유의 원칙, 사적 자치의 원칙과 앞뒤 짝을 이룬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결정권에 기초한 사적 계약을 공동체의 기본적 법률관계로 존중하는 동시에, 당사자에게 신의(good faith)에 입각해 성실히 약속을 이행할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사적 계약의 불가침성은 고대 이집트와 중국에서도 도덕적ㆍ 종교적 뿌리가 깊은 사회 규칙이었다.
■ 이렇게 보면, 민법 교과서 첫머리에 나오는 법언을 사퇴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자못 어색하다. 그는 검ㆍ경 수사권조정 합의가 국회 입법과정에서 깨진 것에 "팍타 순트..."를 외쳤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 활동과 국회 입법행위는 사적 자치의 영역과 거리 멀다. 정책과 입법이 잘못됐다고 목청껏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약속'을 신성한 불가침의 가치로 치켜든 것은 국가의 공법적 규율, 국가 형벌권 실현을 책임 진 이에게는 마땅치 않다. 사랑의 약속이 깨진 것에 '팍타 순트…'를 읊은 어느 외국 가수가 오히려 낫다.
■ 섣불리 수사지휘권을 내주면 인권과 정의가 후퇴한다는 우려를 외면할 건 아니다. 집단 사의를 충정으로 여길 만도 하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수사권 조정은 시기상조"라고 되뇐 만큼, 사회와 경찰의 변화를 마냥 무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검ㆍ경 합의와 어긋난 국회 입법권 행사는 검찰의 비리수사에 대한 부당한 반감이 작용했다지만, 그 정도 수사권 조정에 존립기반을 빼앗긴 양 거칠게 맞서는 모습은 국민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게다가 검찰총장의'약속 위반'발언은 공공의 이익보다 조직 이기주의를 앞세운 듯한 인상을 남겼다.
■ 수사권 조정은 검찰이 서구처럼 기소와 재판에 주력하는 변화를 예고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 되면, 검사들이 법과 제도를 넘어 오래도록 누린 세속의 지위와 권세를 잃을 수 있다. 전관예우 등의 부당한 특혜도 사라질 것이다. 검찰총장은 그 견고한 특권을 허무는 것에 끝내 저항하는 모습을 동료, 선후배들에게 과시한 것일까. 김황식 총리는 대통령의 만류를 뿌리 친 막무가내 사퇴를 그저"도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약속보다 중한 실정법을 어긴 위장전입 등 여러 허물이 두드러졌던 그는 역시 공적 대의와 신의ㆍ성실보다 사사로운 이익을 먼저 돌본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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