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분단 초기의 문학인들 행태를 돌아볼 때 언급해야 할 인사들은 또 있다.
가령 장편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 해방 직후 서울에서 발족한 문학가동맹의 위원장으로 만장일치로 추대되었으며, 1888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그 분.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말의 한때는 당대 대표적인 민족운동단체 신간회의 주역이기도 했으나 이미 그 무렵부터 소위 프롤레타리아 좌파 문학인으로부터는 배척을 받기도 했던, 하지만 명실 공히 당시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문학인이다. 그이는 1948년 초에 김 구, 김규식 등과 함께 당시 북한 측이 주관한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 차 평양으로 갔다가, 북한 쪽의 간곡한 설득에 그대로 북에 남는다.
그러나 그이 스스로 분명히 밝혔듯이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 발행되던 잡지 의 1948년 5월호에 실린 대담에서 그이는 자기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대담을 나눈 설정식이 “문학가동맹이 무얼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라고 항의조로 묻자 이렇게 답했다.
“나는 문학가동맹과는 관계도 깊고 또 아는 사람도 많지만, 어느 일부 사람들은 내가 늘 주장하는 ‘홍익인간’이나 ‘민족주의’에 대하여 심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 같아요. 8ㆍ15 이전에 내가 공산주의자가 못 된 것은 내 양심의 문제였고, 8ㆍ15 이후에는 또 반감이 생겨서 공산당원이 못 되었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공산당원이 되기는 여엉 틀렸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나 같은 사람을 보면 구식이라고, 또 완고하다고 나물 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비교적 그러한 비판들에 대해 이해는 하는 편이지요. 그러나 요컨대 우리의 주의 주장의 표준은, 그가 혁명가적 양심과 민족적 양심을 가졌는가, 안 가졌는가 하는 것으로 규정 지을 수 밖에 없지......”
그러니까 그이는 자신의 혁명가적 민족적 양심에 따라 북한을 선택했다는 셈인데, 그 뒤 북한 정권이 성립되자 곧장 내각 부수상의 자리를 맡는다. 북한에서 그이는 김일성, 박헌영 등과 함께 소련 방문 길에 오르기도 하며 근근이 1968년까지 80 평생을 견뎌내지만, 일종의 들러리였을 뿐이다. 월북한 문학인과 지식인들 거개가 숙청이나 처형을 당하는 속에서 그렇게 끝까지 천수를 다했다는 것부터가 조금 어이없기도 하지 않은가.
1948년은 5ㆍ10 총선거로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된 해다. 그즈음 문단 내부의 좌우 이념 논쟁은 당대 대표적인 우익 논객 김동리와 좌익 쪽 김동석의 대담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새로운 편집으로 발간되던 국제신문은 주필에 송지영, 편집국장에 정국은으로 독자들의 주목을 끌었는데, 한번은 ‘민족문학의 새 구상’이라는 제목 아래 두 사람의 대담을 실었다.
김동리가 물었다.
“프랑스의 사르트르 문학을 어떻게 보는가?”
김동석이 답했다.
“물론 반동이다. 막다른 골목에 든 자유주의의 마지막 발악으로서 시대와 역사에 반항하는 발악문학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본다.”
김동리가 받아쳤다.
“나에게는 주의니 반동이니 그런 따위들이 문제가 아니다. 도대체 20세기의 문학은 무력하고 빈약하다. 실존주의든 공산주의든, 또 무슨 프르스트의 잠재의식의 문학이든, 모두가 문학정신들이 얕고 약하다. 하지만 우리의 형편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우리에게는 서구 사람들과 같은 그런 20세기가 애당초에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서의 현대는, 그 사람들의 18, 9세기를 합친 것에다 동양이란 특이한 전통을 갖고 있다.”
김동석이 반박했다.
“바로 그것이 문제이다. 20세기 문학을 부정하는 그 이론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하다. 김군이 20세기 현재의 문학을 저조하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건 왜냐하면 김군의 문학은 20세기 이전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완고한 자기를 폭로하고 있는데, 바로 그것은 김군의 문학이 과거에 속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김동리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자리서 어떤 말을 하건, 그건 우선 김동석 군의 자유라고 해 두자.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 문학을 서구의 20세기 문학이란 개념에다 접속시키며 한 묶음으로 일괄하려는 자네의 그 기계주의와 공식주의는 내 경우로 볼 때는 문자 그대로 넌센스이다.”
이 두 사람을, 8ㆍ15 뒤에 중국 상해에서 마악 돌아온 박거영이라는 시인이 명동 초입에 차렸던 자기 사무실 2층에다 불러 서로 화해하기를 도모하기도 하였지만, 그건 동리 말대로 당시로서는 넌센스였다.
이 무렵 어느 날은 그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거지 꼴의 행려병자 하나가 있었다. 바로 ‘보리피리’의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었다. 좌우 이념 논쟁이 치열하던 당시 풍경과는 따로 노는 이질적 장면이라 하겠다.
어떤가. 이 하나하나의 대강 60여년 전의 우리 문단 풍경은 6ㆍ25전쟁 전이어서 아직은 좌우 피아 간에 요 정도의 온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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