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들이 동유럽으로 '탈출'하고 있다. 중산층이 주도하는 해외이주 바람은 과거 공산당 치하에서 구 소련군이 주둔했던 동유럽 지역에 집중되고 있다.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는 인기 이주국으로 부상해 있다. 체코에는 거주권을 지닌 러시아인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이주해온 러시아인 숫자와 동일한 3만명이나 된다. AP통신은 27일 "구 소련군 철군 20년 만에 러시아인들이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올해 1~5월 자본 350억달러가 순유출되는 등 중산층 이주에 따른 경제충격을 겪고 있다. 그러나 남은 중산층과 젊은이들도 머지않아 해외 이주를 계획하고 있어, 충격파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한 여론조사기관이 이달 138개 지역에 사는 18~24세의 젊은이 1,600여명을 조사한 결과 39%가 '러시아를 떠나고 싶다'고 응답했다.
탈러시아 바람은 무엇보다 러시아 상황이 자국민을 해외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러시아 야당 지도자 미하일 카시아노프는 "사유 재산권이 침해받고, 사업 환경도 나빠졌다"며 "개인 자유마저 위협받고 있다"고 AP통신에 말했다. 러시아 정부도 비우호적인 투자환경을 인정하고 있다. 아들 가진 가정은 징병을 피하려 러시아를 떠나고 있다.
이런 러시아인에게 유럽연합(EU) 가입 이후 경제 활력을 찾은 동유럽권은 매력적인 이주지다. 러시아 부자들은 과거 영국, 미국에 거주하거나 그곳으로 자녀들을 유학시켰으나 이제는 물가가 저렴하고 생활여건이 유리한 동유럽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다섯 살 된 딸, 남편과 함께 프라하에 정착한 월간 러시안워드 편집장 안나 클레비나는 "더 이상 영국에서 러시아 억만장자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며 "전차가 제때 오가는 프라하가 더 믿을만하다"고 했다.
러시아인들은 특히 구 소련시절인 1968년 프라하의 봄과 89년 시민들의 벨벳혁명을 통해 자유의 분위기가 강해진 체코를 선호하고 있다. 조기 정착이 쉽고 언어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점도 체코의 강점이다.
오렌지 혁명에도 불구하고 부패와 경제위기에서 탈피하지 못한 우크라이나에서도 무려 12만명이 체코로 이주했다. 구 소련군 7만5,000명이 철수한 지 2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체코인들 역시 과거 경험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32세의 한 프라하 시민은 "과거 일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러시아 마피아가 활개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 시절 외무장관을 지낸 보리스 판킨은 "러시아인의 엑소더스는 우리가 그간 얻고자 했던 권리인 자유를 성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긍정 평가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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