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 남북 관계의 정황을 그 무렵 두 번에 걸쳐 직접 다녀왔던 경험을 소재로 써냈던 본인의 단편소설 ‘판문점’을 중심으로 앞에서 조금 살펴봤다. 내친 김에 그보다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나라가 분단되던 초기 1945년 전후의 몇몇 문학인들 동태까지 한번 들여다 보는 것도 그런대로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다.
우선 이기영. 작금에 그이가 태어난 천안시에서 ‘이기영문학상’을 제정한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월북 작가의 이름으로 문학상이라니, 참으로 이런 정도로 우리 사회가 변해 왔는가 싶어 새삼 놀랍다.
이 나라가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되던 1945년 가을, 이기영은 북한으로 넘어갔다. 이듬해 1946년 8월에는 해방 1주년 기념 문화사절단장으로 평양에서 소련을 다녀와서, 그 방문기를 서울에서 발행되던 잡지(그 주간은 인기소설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였음)에 1947년 봄 두 번에 걸쳐 발표했다. 그 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 남북 관계가 그 정도로 툭 터져 있었던 것이다.
그 방문기 내용을 보더라도, 2011년 오늘의 서울에 사는 우리로서는 심히 어이가 없다 못해 피시시 우스워지기까지 한다. 자신이 북한 체제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혀 놓기도 한 이 글에서 그는, 1936년엔가 소련을 방문한 뒤 소련 사회를 획일주의라고 혹평했던 프랑스의 세계적 소설가 앙드레 지드를 반박했다. 자기가 보기에 그건 반동 사상가의 치우친 견해에 불과하다, 획일주의로 보이는 그런 면모야말로 유물론 사회의 아름다운 ‘통일주의’다, 폄하할 게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인민의 나라’ ‘만백성이 생활을 즐길 줄 아는 나라’로 격찬하고 싶다고 썼다. 어떤가, 현금 소련이라는 나라가 통째로 망해 없어진 마당에 보자면. 그이의 살아 생전 저런 소리는 실로 우습고 황당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이기영이 월북한 것도 이유가 따로 있다. 본인은 남과 북 두 체제 가운데 북쪽을 선택했노라고 자못 무겁게 운운했지만, 실은 사랑의 도피행이었다. 그 무렵 그이는 본처 말고 작은 댁과 은밀하게 딴살림을 차리고 있었는데, 아예 본처 소생의 자식까지 버리고 작은 댁과만 북으로 간 것이다. 본처 소생의 친자식은 어쩌면 남한 어디엔가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기영을 꼭 한 번 본 일이 있다. 1949년엔가, 월남하기 직전 원산의 어느 초등학교 강당에서였다. 그날 그이는 ‘문예총 위원장’이라는 자격으로 특강을 하러 왔다. 체격이 작았다. 그저 그랬다는 평범한 느낌뿐, 특강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월남한 뒤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이는 북에서 줄곧 문화예술계의 지도자로 있으면서 뛰어난 미모의 무용수를 며느리로 들였다. 그 며느리인즉 바로 성혜림, 나중에 김정일이 반해서 첫 번째 부인으로 삼은 바로 그 여인이다. 며느리를 생으로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으니 그 속 마음이 과연 어떠했을까.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소설가, 1904년 강원도 철원 생의 이태준.
그이는 해방 뒤 1946년까지는 서울에 있었는데, 이기영이 소련에 갈 때 그 일원으로 끼어 월북을 했다. 그 직전에 소설가 채만식과 최태응을 목동의 자기 집으로 불러,“나는 북쪽으로 가서 2, 3년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 쪽은 보니까 미군이라는 건달이 하는 짓이 도무지 정치 꼴이 아니다” 라며 같이 월북하기를 권했다고 한다. (최태응의 증언)
그 뒤 1946년 10월 20일 서울의 ‘문학동맹’ 앞으로 보내온 서신에서도 이태준은 공산 사회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떠날 때는 돌아와 만나는 즐거움과 일에 더 충실함으로 갚으려 했던 노릇이 그만 여기서 걸음을 멎게 되었습니다......소비에트는 무엇보다 인간이 부러웠습니다......자연으로 돌아가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 받느니라. 아무리 외쳐도 일허버리기만 하던 인간성의 최고의 것이 유물론 사회에서 소생되어 있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제도의 개혁 없이는 백 천 번 외쳐대야 미사여구에 불과하므로 예술이 인간에 보다 크게 기여하려면 인간으로 하여금 바르게 못 살게 하는 제도의 개혁부터 해야 할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라고 썼다.
1947년 4월 15일에 발간된 제 3호에 실린 ‘붉은 광장에서’라는 그의 기행문 한 토막도 앞의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남한의 혼돈된 사회를 겪다가 불현듯 난생 처음으로 가본 소련, 그리고 그 소련을 닮아 가려는 북한 사회가, 제대로 정돈되어가는 사회로 믿음직스럽게 보였다고?
이러한 관찰이 얼마나 유치하게 얄팍하고 상투적인 것이었는가 하는 점은, 그이 자신부터 얼마 안 가서는 후회막급으로 한탄스러웠을 터이지만, 이미 그이로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오늘 2011년에 우리가 이 서울에 살면서 그 시절 그들의 행태를 뒤늦게 돌아다 보는 심정은 과연 어떠한가. 남ㆍ북한 지식인들 간에 옛날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무척 놀랍게 느껴지고 어느 한편으로는 그리워지기까지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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