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편집국에서] 1000원의 가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편집국에서] 1000원의 가치

입력
2011.06.27 11:25
0 0

몇 해 전 방송된 한 TV 프로그램에 '천원의 만찬'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연예인 등이 출연해 고마움을 전하고픈 이에게 단돈 1,000원으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내용이었다. 출연자는 장을 보며 단돈 100원을 깎기 위해, 혹은 야채 한 줌을 덤으로 얻기 위해 상인들 앞에서 노래 부르고 춤 추고 애교 부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함께 방송된 '만원의 행복'이 1주일간 1만원으로 버티는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을 통해 돈의 소중함을 새삼 되새기게 했다면, '천원의 만찬'은 작은 돈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액면가로만 환산할 수 없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감동적으로 전했다.

돌이켜 보면, 큰 돈을 뭉텅 쓸 때보다 작은 돈을 쓸 때 돈의 가치를 더 따지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1,000원짜리 지폐는 내 지갑 안에 있을 땐 누가 슬쩍 꺼내가도 눈치 채기 어려운 푼돈이지만, 내 손으로 꺼내 무언가를 위해 쓸 땐 몇 십 배, 몇 백 배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자판기 커피 두어 잔 값을 아껴 지하도 걸인에게 건네고 느끼는 작은 기쁨, 무심코 켠 TV에서 이웃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접하고 전화기를 들어 ARS 모금에 동참하며 느끼는 작은 보람 같은 것 말이다. 미친 물가 탓에 5,000원 갖고도 점심 한 끼 사먹기도 힘들다는 요즘, 쓰임에 따라 달라질 단돈 1,000원의 가치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KBS 수신료 1,000원 인상안 처리를 놓고, 국회가 몸싸움에 도청 논란까지 볼썽 사나운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1981년 가구당 2,500원으로 책정된 뒤 30년째 한 푼도 오르지 않은 수신료를 이번에는 기필코 올려야 한다고 덤비고, 야당은 공영방송의 생명인 공정성과 제작 자율성을 보장할 제도적 장치 마련 등이 전제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둘 다 일리 있는 주장 같지만, '국민의 방송' KBS를 '정권의 방송'쯤으로 여겨온 정치권의 그간 행태를 떠올리면 어느 쪽도 선뜻 손 들어주기 어렵다. 진성호 한나라당 의원이 25일 밤 KBS '생방송 심야토론'에서 "2007년 민주당이 여당이었을 땐 지금과 반대로 민주당이 수신료 인상을 주장하고 한나라당이 반대했다"고 지적했듯이, 다음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 여야는 또 자리만 바꿔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할 게 뻔하다.

수신료는 TV가 있는 가정이면 누구나 내야 하는 일종의 준조세다. 지상파 TV, 특히 KBS를 보는 대가로 내는 돈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국민 대부분이 케이블, 위성TV 등 유료방송을 통해 지상파를 시청하고 있다. 국민이 유료방송 이용료와 기존 수신료 2,500원에 더해 1,000원을 추가로 기꺼이 부담한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 이런 공영방송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동의의 표시인 셈이다. 정치권이든 KBS든 그런 동의를 이끌어낼 노력은 하지 않은 채 국민에게 지갑을 열어라 마라 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벌써 몇 달 전 일인데, 수신료 인상에 목을 맨 KBS가 일찌감치 보도국 정치부 기자들을 동원해 국회의원들을 각개격파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민주당 의원들의 오락가락 행보에는 그런 저간의 사정도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그런 노력의 반의 반만이라도 국민을 설득하는데 쏟을 수는 없을까. 해바라기라는 굴레를 벗을 수 없는 낙하산 사장이 군림하는 조직에는 너무 지나친 요구일까. 국민은 지금 묻고 있다. "왜 우리가 무늬만 '국민의 방송'을 위해 돈을 더 내야 하는가"라고.

이희정 문화부장 jay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