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의 별명은 '재계의 신사.' 전경련 회장을 맡기 전부터, LG그룹 시절 그리고 GS그룹으로 분리한 뒤에도 재계인사들은 그를 '신사'로 불렀다.
그런 그가 변했다. 이젠 그를 '투사'로 부른다. 2월 전경련 회장 취임 이후 긴 침묵을 깨고 주요 현안에 대해 자기 입장을 내놓기 시작한 그는 의례적인 멘트 차원을 넘어 강도 높은 발언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파이터 허(許)'란 말까지 등장했고, 일각에선 "역대 전경련 회장 가운데 가장 발언수위가 높다"는 평가도 나온다.
기대
지난 2월24일 허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취임했을 때 그를 향한 재계의 기대는 꽤 컸다. 그도 그럴 것이 1999년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물러난 이후, 10대 그룹 총수로는 12년 만에 재계수장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김우중 전 회장 이후 김각중-손길승-강신호-조석래 등 4명의 회장이 거쳐갔지만 모두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재계를 대표하기엔 ▦소유기업 규모가 너무 작거나(김각중 경방회장, 강신호 동아제약회장) ▦오너 아닌 전문경영인 출신(손길승 SK회장)이란 점은 큰 핸디캡이었다. 조석래 전 회장조차 효성그룹의 규모(재계 20위전후)와 이명박 대통령과 사돈관계 등 때문에 운신폭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 만큼 재계서열 7위의 GS그룹 수장인 허 회장 체제에 대한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한 재계 고위소식통은 "1980~90년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최종현 SK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이 전경련을 이끌었던 때만큼은 안되더라도 모처럼 대그룹 출신 회장이 재계수장을 맡게 된 만큼 위상은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망
하지만 허 회장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초과이익공유제 도입을 역설할 때도,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연ㆍ기금의 주주권 행사를 주장할 때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부 쪽에서 기업들에게 가격인상 자제를 공공연히 요구하고,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작업을 구체화하는 등 재계입장에선 연일 '공격'을 받는데도 허 회장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재계 곳곳에선 "허 회장이 너무 말을 아낀다" "전임 마이너그룹 회장들과 다른 게 없지 않나"란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전경련 실무진에는 "대기업들이 이렇게 당하고 있는데 허 회장과 전경련은 도대체 뭘 하고 있나. 회비가 아깝다"는 불만이 여러 그룹으로부터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재계 고위관계자는 "원래 허 회장은 젊을 때부터 그룹에서 재무 같은 안살림을 많이 챙겼다. 부드럽지만 상당히 치밀하고 강단 있는 사람으로 정부눈치나 보는 스타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래도 전경련 회장이기에 앞서 한 그룹을 이끌고 있고, 더구나 기름값 인하의 경우 당사자인 만큼 내놓고 불만을 얘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놀라움
그가 마침내 입을 연건 지난 21일 기자간담회. 일단 말문이 터지자, 그는 거침없는 소신발언을 쏟아냈다. 감세철회, 반값등록금 등을 주도하는 정치권에 대해선 '포퓰리즘'이라고 쏘아붙였고, 정부의 동반성장과 휘발유가격 인하 등에 대해선 "그 정도면 고통분담 할만큼 한 것 아닌가"라며 냉소적 언급도 마다치 않았다. 24일에는 첫 대면한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의 면전에 대고 "정부가 중요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 분명한 원칙을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라고까지 했다.
이런 허 장관의 강성발언에 대해 재계는 깜짝 놀라는 분위기다. "이 정도로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는 반응 일색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허 회장에 대해 "원래 발언에 신중한 스타일"이라며 "그 동안 소신이 없어서 침묵했던 것이 아니라 충분한 얘기를 듣고 생각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걸렸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냥 전경련 회장이어서가 아니라 시장경제원리에 대한 확고한 소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한 것으로 보면 된다"면서 "허 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한번 얘기를 하면 이렇게 강하게 얘기할 것으로 알고 있고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허 회장도 당분간은 '자제'모드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정부 및 정치권과 갑자기 대립각을 세운 만큼, 또 재계를 보는 국민여론이 여전히 비판적인 만큼, 더 이상 자극적인 발언은 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분석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내년 대선까지 정부ㆍ정치권과 재계의 긴장관계는 계속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허 회장도 필요할 때 필요한 목소리는 꼭 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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