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은 많은 것들이 생략된 뼈대만 있는 단편이어서 연극으로 어떻게 옮길까 걱정스러웠는데, 극에 빨려들 수밖에 없었어요. 감동적이었습니다.” (소설가 김연수)
“짧고 단순한 문장들 사이에서 단단한 무엇을 보여주는 카버 소설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했어요.”(연출가 민새롬)
25일 오후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무대에서 소설가와 연극 연출가가 만났다. 장르는 다르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전류는 서로를 감전시키는 듯했다.
신진 연출가들이 기획한 ‘단편 소설 극장전’의 하나로 이날 무대에 오른 작품은 레이먼드 카버의 동명 소설을 옮긴 ‘코끼리’. 공연이 끝난 뒤 극을 연출한 민새롬(31)씨와 소설가 김연수(41)씨가 관객들과 함께 단편 소설과 연극의 만남을 주제로 특별한 대화의 자리를 마련했다.
두 사람은 모두 카버의 팬이라고 했다. 1970~80년대 미국 단편 문학의 부활을 주도한 카버는 사실적이면서 간결한 체호프적 문장을 통해 인간 관계의 소외와 외로움, 불안, 부조리 등 카프카적 세계를 보여준 작가다. 카버의 단편을 읽으며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는 김씨는 2007년 카버의 세번째 단편집 을 직접 번역했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인데, 그 간결한 문장들이 오히려 말하지 않은 부분을 주목하게 해요. 힐끗 뭔가를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쓰지 않고 얘기를 하는 것인데, 소설가로서‘끝내준다’고 느꼈어요.”
김씨가 궁금해 한 것은 특별한 사건이 없는 카버의 작품을 어떻게 연극화할 수 있을까였다. 하지만 민씨는 바로 그 대목에 주목했다고 했다. “말 없이 인간 관계의 심연을 보여주는 데 큰 감동을 받았어요. 그게 제가 찾고 싶었던 무대였거든요. 뭔가 전달하기 위해 급급한 극이 아니라 대사 사이를 통해 어떤 심연을 보여주는 것이죠.” 연극은 그래서 단편 미학과 통한다는 것이 민씨의 생각. 덜어내고 압축해서 삶의 비의적 순간, 그 정수리를 불현듯 보여주는 것이다.
‘코끼리’는 궁핍한 환경에서 가족들에게 꼬박꼬박 돈을 부치는, 또 그러기를 강요 받는 한 남자의 힘겨운 고백을 그린 단편. 국내에서 카버 작품을 무대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연 초반 어머니와 동생, 아들, 딸의 돈 요구에 시달리는 남자의 모습은 모래알을 씹듯 관객들을 힘겹게 하지만, 후반부 남자가 아버지의 무등을 타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두 팔을 벌리고 걷는 장면 등에서 음악과 영상이 어울려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김씨는 “소설에서 느낀 정서를 공감각적으로 실물감 있게 전해 소설가로서 부러움도 느꼈다”며 “처음 생각과 달리 카버 소설이 연극에 잘 맞을 수 있겠다 싶다”고 말했다. 민씨는 “문장에서 느낀 감동을 음악, 영상, 조명, 배우 등 다양한 장치로 구체화할 수 있는 게 극의 매력”이라면서도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히는 소설적 매력을 제한하는 한계도 느꼈다”고 말했다.
8일부터 26일까지 산울림소극장에서 열린 ‘단편 소설 극장전’에는 ‘코끼리’와 전진모씨가 연출한 김승옥 원작의 ‘서울 1964년 겨울’, 박지혜씨가 연출한 다자이 오사무 원작의 ‘개는 맹수다’ 등 세 편이 올랐다. 프로듀서를 맡은 극단 청년단의 신민경씨는 “젊은 연출가들이 감명 깊게 본 소설 작품을 얘기하다 의기투합해 기획전을 하게 됐다”며 “단편과 연극이 통하는 부분이 많아 매년 단편소설 극장전을 열어 장르적 만남을 이어갈 계획이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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