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학기술부 5,000원, 국토해양부 8,000원, 지식경제부 1만원. 요즘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거 모르면 범법자 된다는 말이 돈다. 연구비 지원 부처마다 1회 식비로 인정하는 금액이 다르다는 소리다. 금액뿐 아니다. 뭘 먹는지, 언제 먹는지도 감사 대상이 된다.
"현실과 동떨어진 규정이 많아요. 현장 연구자들 불만 전화가 수시로 옵니다. 우리가 이 의견들 수렴해서 정부에 적극 건의해야죠. 부끄러울 게 없는 99%의 과학자들이 연구비를 유용하는 극히 일부 과학자들 때문에 피해를 보니까요."
26일로 출범 2주년을 맞는 한국연구재단의 오세정(58) 이사장은 20일 서초구 염곡동 서울사무소에서 기자와 만나 답답함을 토로했다.
"대학 연구실에선 주말에 나와 실험하고 토론하며 쓰는 비용이 회의비로 인정이 안 돼요. 행정부서에 주말 일정을 일일이 제출해야 회의비를 받을 수 있죠. 어떤 연구자는 피자 시켜 먹은 것도 감사에 걸렸다고 들었어요." 피자는 간식메뉴라 식사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었단다. 반면 식당에 가서 순대를 사먹으면 식사로 쳐준다는 것이다.
올해 연구개발(R&D) 예산은 약 15조원. 10여년 전보다 10조원 이상 늘었다. 연구비 쓰임새에 감사의 눈길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오 이사장은 "불합리한 규정이 너무 많은데다 부처별로 규정이 달라 연구자들이 일일이 확인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게 범법자가 돼 있기 일쑤다.
연구비 관리가 까다롭다 보니 일부 과학자들 사이에선 큰 연구과제의 책임자를 기피하는 현상마저 생겼다. 최근 연구비 유용으로 검찰에 고발된 KAIST 교수가 심적 부담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이 같은 리더십 부재 분위기는 더욱 짙어졌다.
"연구비로 골치 썩을 바에야 작은 과제만 골라 하겠다는 거죠. 과학자들 부주의도 문제지만, 단순 실수와 의도적 유용을 가릴 수 있는 연구비 관리제도를 만드는 게 급선무예요."
한국연구재단은 국내 최대 규모의 연구비 지원∙관리기관이다. 교과부 R&D 예산 4조8,000억원의 3분의 2 가량을 다룬다. 정부 전체 R&D 예산의 약 20% 규모다. 정부 연구비를 받는 현장 과학자들의 생생한 의견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오 이사장은 "연구비 관리제도를 총괄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국과위)에 현장의 의견과 경험이 녹아있는 아이디어를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요즘 국과위에선 부처별로 다른 연구비 규정을 통일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다.
오 이사장은 연구 평가 풍토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열심히 연구했는데 목표한 성과를 내지 못한 과학자들에 대해 좀더 너그러워져야 해요. 실패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모험적이고 혁신적인 연구를 누가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연구재단은 올해부터 '성실실패' 용인제도를 도입했다. 연구전반에 대한 평가조사를 거쳐 연구를 성실히 수행했는데 불가피한 사유로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인정되면 책임을 묻지 않는 것. 생명공학 의약학 융합과학 분야의 과학자 4명이 지난 4월 처음으로 성실실패를 인정받았다. 과거에는 소기의 성과를 내지 못하면 수년 동안 정부 연구비를 신청하지 못하는 등 제제를 받아 과학자들이 '안전한' 연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노벨상을 받거나 인류의 지식에 기여할 수 있는 기초원천 분야의 독창적인 성과를 과학자에게 기대하려면 여유와 인내가 필요해요. 그게 과학문화선진국 아닐까요."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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