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바람이 휑하니 부는 아프리카의 어느 난민촌. 안톤(미카엘 페르스브렁)을 비롯한 의료 봉사진은 퇴근을 앞두고 갑자기 바빠진다. 칼에 배를 찔린 임신부가 실려왔기 때문이다. 사고 내막을 안 뒤 안톤 일행은 몸서리를 친다. 한 군벌의 대장이 부하들과 태아의 성별 맞추기 내기를 한 뒤 '정답'을 알기 위해 저지른 만행이었던 것이다. 주먹이 곧 법인 야만의 땅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 하지만 선진국들이 몰려 있고,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서구는 과연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인 어 베러 월드'는 그런 우문에 단연코 아니라고 답하는 영화다. 크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폭력은 운명처럼 삶에 스며 있고, 폭력에 대한 용서만이 그나마 탈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을 조망한 뒤 면밀히 분석하는 눈이 예리한 영화다.
안톤의 가족이 살고 있는 덴마크도 폭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이들이 평화롭게 자전거를 타고 향하는 학교에도 폭력이 물들어 있다. 안톤의 10세 아들 엘리아스(마르쿠스 리가르드)는 툭 튀어나온 앞니와 스웨덴 사람이라는 이유로 왕따와 폭력에 시달린다. 어머니를 암으로 잃은 뒤 영국에서 전학 온 크리스티안(윌리엄 욘크 닐슨)도 엘리아스를 돕다 폭행을 당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심성이 거칠어진 크리스티안은 곤봉 세례와 칼로 위협하며 복수에 나선다. 크리스티안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 태도에 엘리아스는 호감을 갖게 된다.
영화는 폭력의 순환고리와 이를 끊을 수 있는 방법 사이에서 배회한다. 안톤이 엘리아스, 크리스티안 등과 함께 있다가 한 어른한테 부당하게 뺨을 맞는 봉변을 당하면서 영화는 말하고자 하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내가 그 사람을 때리면 그 사람과 똑같아진다"는 안톤, 얻어 맞고도 힘으로 대응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실망하며 자신들만의 복수를 꿈꾸는 엘리아스와 크리스티안의 입장이 서로 엇갈리며 영화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영화는 폭력엔 폭력으로 맞서는 본능적인 대응과 폭력의 반복을 끊으려는 이성적인 자세 중 과연 무엇이 옳은 결과를 부를 것인가에 대해 묻는다. 소원한 가족관계에서 비롯된 감정의 파탄, 주변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 등이 폭력을 부를 수 있음을 보여주며 폭력의 근원을 찾기도 한다.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하는 것은 폭력에 대한 세심한 성찰만이 아니다. '인 어 베러 월드'는 뛰어난 성장영화이면서도 가족영화이고 사회 드라마다. 10대 소년의 방황과 우정을 담으면서도 사회 속에 내재된 폭력의 딜레마를 묘사한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구축해 가며 삶의 본질을 묘파하는 섬세한 연출이 돋보인다. 심장을 죄는 서스펜스가 쉼표와도 같은 북구와 아프리카의 자연풍광과 어우러져 강렬한 체험을 선사한다.
군벌 대장의 다리를 치료하는 인술을 펼치던 안톤은 결국 견딜 수 없는 분노에 무너진다. "그 놈은 당해도 싸"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의 복수에 나서는 엘리아스의 행동과 안톤의 그런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제목처럼(영어 제목 'In a Better World) 우리는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없는 것일까.
영화의 시작과 끝은 해맑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안녕하세요"를 연발하는 모습으로 장식한다. 어른들 세계이건 아이들 세계이건 폭력이 위력을 발휘하는 세상이라지만 감독은 차마 희망을 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오픈하트'(2002)로 덴마크 영화계의 간판으로 떠오른 수잔 비에르 감독. 올해 미국 아카데미영화상과 골든글로브에서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23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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