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유지는 어떻게든 근근이 할 수 있겠죠. 3~5년 뒤가 문제예요. 과연 정말 자립할 수 있을지…."
경기 수원시 영통구에 있는 나노소자특화팹센터(이하 특화팹) 연구원들은 요즘 불안하다. 특화팹이 정부지원 없이 자립할 수 있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안팎에서는 자립이 쉽지 않을 거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비단 여기만이 아니다. 전국에 이 같은 나노팹이 5곳 더 있는데, 사정은 다르지 않다. 첨단 나노기술 분야에서 세계 5위권에 진입한다는 목표로 2002년부터 야심 차게 시작된 나노팹이 최근 위기를 맞았다.
나노 실험 공공서비스
특화팹 내 클린룸. 16일 오후 이곳에 들어서자 "윙, 윙"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했다. 먼지를 걸러내는 공조기가 작동하면서 나는 소리다. 덕분에 이곳은 1년 내내 먼지 농도가 공기 1㎥당 100개 이하로 유지된다. 3,300㎡ 면적의 클린룸에는 실험장비 180여 개가 가득 차 있다. 그 중 하나인 유기화학증착장비(MOCVD)에 김창주 선임연구원이 지름 10cm의 둥근 웨이퍼 12장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MOCVD는 웨이퍼 위에 얇은 박막을 수십 겹 쌓아 태양전지에 들어가는 소자를 만드는 장비. 장비 옆 컴퓨터 모니터에는 숫자가 가득했다. 장비 내부의 온도와 가스 농도 등을 나타내는 수치들이다. 김 연구원은 "이들 수치가 조금만 달라져도 소자 기능이 확 떨어진다"며 "올해 국내에서 효율이 가장 높은 태양전지를 개발했는데, 1등 공신이 바로 이 소자"라고 소개했다. 그 태양전지의 효율은 31%. 태양에너지를 100만큼 받으면 31만큼 전기를 만든다는 소리다. 김 연구원은 "2008년 20억원을 들여 구축한 MOCVD가 없었다면 개발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MOCVD를 비롯한 180여 개 장비는 외부 연구자들에게도 개방된다. 바로 이게 나노팹의 본래 기능이다. 규모도 크고 가격도 비싸 보통 연구기관이나 기업, 대학이 확보하기 어려운 실험장비를 갖춰놓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일종의 공공실험시설이다.
이용료만으로 운영 어려운 현실
전자기기가 점점 작아지고 생명현상을 원자나 분자 같은 미세한 수준까지 들여다보게 되면서 세계 과학계는 나노기술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졌다. 나노미터(1nm=10억분의 1m) 크기의 물질을 조작하고 수nm짜리 부품을 개발하려면 특수장비가 꼭 필요하다. 특히 나노기술로 만든 물질이나 부품이 잘 작동하는지 평가하고 산업화를 위한 시제품을 제작할 때는 여러 장비들이 연결된 나노공정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이에 정부는 2002년 국내 연구자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나노팹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현재 운영 중인 나노팹은 총 6곳. 수원 특화팹, 대전 나노종합팹센터, 대구 나노융합실용화센터, 포항 전북 광주의 나노기술집적센터다. 그런데 이들 나노팹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올해로 모두 끊기면서 비상이 걸렸다. 고가의 장비 구입을 지원하던 교육과학기술부와 지식경제부는 나노팹이 열 살이 됐으니 이젠 자립할 때가 됐다는 입장이다. 자체 수익으로 운영하라는 얘기다.
나노팹의 수익은 장비를 쓰는 연구자들에게 받는 이용료에서 나온다. 나노팹 장비 이용료는 장비 가격이나 사용 시간 등에 따라 수만~수십 만원. 민간 연구소에서 받는 장비 이용료와 비교하면 대략 5분의 1 수준이다.
예를 들어 수원 특화팹에선 30억원짜리 장비 한 대를 쓰는데 시간당 20만원을 받는다. 이렇게 받는 이용료는 특화팹 전체 연간 운영예산 200억원의 약 25%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건물에 입주해 있는 업체들에게서 받는 임대료 등으로 충당하고 있다. 더구나 설립 초기엔 계속 증가하던 장비 이용 건수가 이젠 제자리걸음이다. 2009년과 2010년 이용 건수는 각각 1만105건과 1만243건이었다. 장비 가동률은 60%에도 미치지 못했다(2009년 기준). 앞으로 이용료 수입이 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얘기다. 안동구 특화팹 기획관리실장은 "이용 건수가 감소한 건 현 장비로 할 수 있는 연구가 줄었다는 의미"라며 "장비를 교체하지 않으면 이용 건수는 계속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수도권에서 가까운 특화팹과 연구자들이 밀집해 있는 대전 종합팹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전북 나노기술집적센터의 2009년 장비 가동률은 11%에 그쳤다.
선진국 오픈팹 모델 주목
나노기술 실험장비는 보통 5~15년 주기로 교체하거나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첨단실험기법을 따라잡을 수 없다. 신기수 특화팹 운영부장은 "2013년부턴 현재 장비의 적어도 절반을 교체해야 하는데, 300억원 이상이 들 걸로 보인다"며 "그 돈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장비 이용료를 올리면 그나마 조금씩이라도 늘어온 이?건수마저 줄어들까 전전긍긍이다.
부족한 운영예산과 장비 업데이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당장은 정부 연구과제 수주 이외에 뾰족한 대안이 없다. 그러나 나노팹을 자주 이용한다는 한 연구자는 "공공서비스시설인 나노팹이 대학이나 정부출연연구기관처럼 정부 연구비를 가져가는데 대해 과학자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고 귀띔했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나노팹을 지역안배 차원에서 너무 여러 곳 만들어 놓은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나노팹 관계자들은 아직은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정부 입장은 단호하다. 이은영 교과부 미래기술과장은 "노후화한 장비 교체나 업그레이드 비용을 지원할지 여부도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고 밝혔다.
결국 나노팹이 독자생존 하려면 새로운 운영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광호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부연구위원은 미국 국립나노인프라네트워크(NNIN)나 벨기에 아이멕(IMEC)연구소의 '오픈팹' 모델을 예로 들었다. 우리처럼 팹 인력들이 이용자들 대신 직접 실험을 해주는 게 아니라 오픈팹은 이용자들에게 장비 사용법을 가르쳐주며 교육에 대한 비용도 받아 수익을 낸다. 이광호 부연구위원은 또 "대학이나 출연연과 경쟁하지 않고 나노팹의 장비를 활용할 수 있는 공공 목적의 연구주제를 자체적으로 개발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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