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과학은 대상에 대한 본질의 탐구를 추구해 왔다. 천동설처럼 잘못된 해석을 지지한 적도 있고 정치와 종교에 휘둘린 적도 있지만 틀렸든 맞았든 본질의 추구란 점에선 변함이 없었다.
우리 사회는 이런 본질에 대한 이해보다는 자극적이며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이 곧 트렌드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출생의 비밀, 불치병, 재벌2세를 코드로 하는 '막장 드라마'를 들 수 있다. 요즘은 입양아라는 매우 민감한 사안도 새로운 주제로 부각되고 있다. 드라마에서 입양아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뿐더러 음식과 문화에 대한 이해도 한국인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더 한국적 성향을 가진 캐릭터로 등장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입양아들은 생후 수개월 또는 서너 살 때 외국에 입양되어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당연히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국이란 나라는 그들에게 하나의 외국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친부모가 그들을 포기한 깊은 한이 맺혀 있는 나라일 것이다. 과연 작가가 입양아에 대한 조사나 제대로 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이해가 부족한 데 대한 비판 여론이 언론이나 인터넷 매체에 많이 나오고 있다. 입양아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흥미거리 정도로 치부된다는 것을 알면 무척 상처를 받을 것 같다. 물론 드라마가 학문도 아니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소외된 사람들이나 사회의 약한 고리가 주제인 경우에는 그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선행되어야 한다. 투철한 작가 정신이 아쉽다.
광고에서도 본질과 별 상관없는 자극적 표현을 쉽게 볼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노'가 온갖 제품 광고에 들어가더니 급기야 애완동물 탈취제도 온통 나노 일색이다. '은나노'가 은나노 입자인지 아니면 다른 화합물인지,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언급은 없다. 실제로 나노 크기 은 입자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과학적으로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생생하고 밝은 화면이나 오래가는 배터리를 강조하는 국내 기업의 스마트폰 광고 문구는 기술과 문화의 융합을 내세운 미국 A사의 스마트폰 광고와 제품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서 좋은 대비를 보여준다.
이른바 트렌드를 앞서간다는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드라이 에이지드 스테이크(Dry Aged Steak)'가 유행이다. 최상급 소고기 덩어리를 저온에서 수개월 동안 숙성시킨 후 가운데 부분을 요리하면 맛있는 스테이크가 된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고기의 50% 정도를 버리게 된다. 이것을 소비하는 젊은이들은 최상의 스테이크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소고기를 버려야 하는지 알지 못할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맛과 멋만 추구하기 때문에 과정이나 본질에는 관심이 없다. 이것이 지금 우리 신세대의 트렌드다.
지구 인구의 절반, 특히 아프리카나 서남아시아 어린이들이 기아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지구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세계 인구를 먹이고도 남지만 80%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소비되는 육류를 얻기 위해 사료로 쓰인다. 이로 인해 기아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우리 젊은이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책 한 권만 읽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을.
트렌드란 한 나라의 문화와 사회 현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척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본질에 대한 이해와 탐구가 없을 때 트렌드는 그저 소비를 조장하는 허영에 불과하다.
안도열 서울시립대 전자전기컴퓨터공학부 우리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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