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를 소외시키는 삶, 결국엔 병 납니다"
우리의 삶은 불안과 갈등과 상처투성이다. 외부의 시선, 타인과의 경쟁, 사회적 지위 등에 짓눌려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가 그런 사람들에게 내려준 처방은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를 응원하자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인정하고 지지하고 공감해주어야 할 꼭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모은 책 (해냄출판사)을 출판하면서 16일 오후 7시 30분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강연을 했다. 앞서 15일 서울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부근 카페에서도 비슷한 자리를 마련했다. 그가 정한 강연의 제목은 둘 다 '마음 소풍'이었다.
강연에서 정혜신씨가 강조한 것은 자기애 혹은 자기존중이다. "삶의 관심과 방향이 세상 쪽으로 치우쳐 있고, 자신에게는 향하지 않고 있다"는 그의 말에서 자기애 혹은 자기존중의 필요성을 읽을 수 있다. 정혜신씨가 볼 때 한국은 자기애가 특히 부족한 사회다. 그는 "사람에게 주목하지 않는 사회다. 그러다 보니 결핍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배고프면 밥 먹듯 사람은 결핍을 충족시키려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적 요구, 사회적 기준에 따라 결핍을 채우려는 경향이 있다."
그가 언급한 사회적 요구 혹은 기준이라는 것은 가령 명문대학 진학, 전문직종 종사, 높은 경제력 따위인데 부모로부터, 교사로부터는 그런 것들을 가져야 결핍이 해소될 것이라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었다. 거기에 집중하다 보니 자신의 욕구, 감정, 느낌은 뒤로 밀린다. 그래서 정혜신씨는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로 살만한 가치와 권리가 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병이 난다."
그가 전하는 몇 가지 사례를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먼저 후회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해놓고 쉽게 후회를 한다. 정혜신씨의 대답은 이렇다. "결정을 잘못해서, 결정을 잘못했다는 근거가 있어서 하는 후회가 아니다. 그렇게 결정한 나 자신을 믿지 못해, 나 자신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하는 후회다."
다음은 중년 세대의 가장 흔한 걱정 즉 자식의 공부에 대한 것이다. 아이가 공부를 좀 더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대놓고 공부 하라고 했다가 아이와 충돌할 게 틀림없고 내버려두자니 그것 또한 무책임한 것 같고. "지금 아이들은 평균 수명이 110세는 될 것이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른다. 아이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부모라고 아는가. 그런 것을 모르면서, 확신이 없으면서 공부를 강요할 수 있을까. 공부 하지 않는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채근하는 것은 부모의 불안 때문이 아닌가."
굳이 공부 하라고 말하고 싶으면,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자신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대화하라고 일러준다. 일방적으로 공부를 강요하면, 아이는 자기애를 갖기 어렵다. 아이와 대화할 때, 부모의 자기 성찰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아이가 아니라 중년의 직장인에 대한 이야기다. 직장에서 일에 매진하고 일로 평가 받으려는 것과, 일은 조금 미루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10년 후를 위해 더 나은 결정일까. 정혜신씨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100가지를 넘어도, 자꾸 딴 생각이 나면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 속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 꺼내보고 턱 없이 떠오른 생각과 감정마저도 돌아보라는 것이다.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이 든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어느 쪽으로 치우치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 또한 나의 실체다. 그런 나를 소외시키면 안된다. 햇볕에 고추 말리듯 감정을 다 늘어놓고 죽 보면 결정이 분명해지고 쉬워진다."
하지만 부양 가족이 있는 사람은 대체로 책임과 의무를 먼저 떠올린다. 웬만한 욕망은 누르려고 한다. 새삼 자기애를 부각하기에는 상황이 녹록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정혜신씨의 처방도 분명하다. "사람이 자기로 살지 못하면 건강할 수 없다. 그런 삶이 오래 지속될 수도 없다. 나중에 심리적 대가를 한꺼번에 치른다. 그때는 부양도 못할 수 있다. 그것은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기애를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절대적인 방법이 있기 어렵지만 정혜신씨는 외부 자극을 조금 차단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일러준다. '자기 느끼기'를 방해하는 요인을 없애라는 것이다. 단순한 보기를 들자면, 어린 아이는 심심할 때 자기를 느끼기 쉽다. 뭘 하고 놀까 걱정하고 어떤 친구에게 전화할까 고민하면서 자신의 취향, 경향, 선호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사람을 가만 두지 않는다. 느끼기를 방해하는 요인이 너무 많다. 그래서 자기를 느낄 기회가 잘 없다. 그러나 자기를 느끼지 못하면 자기애가 생기지 않는다. 자기애가 없으면 타인의 문제에 무관심하고 타인과 원만한 소통도 할 수 없다. 자기애가 없으면 건강하지 못하며 타인에게 상처 주기도 쉽다. 하지만 자기애가 있으면 타인에게 너그럽고 그 사람을 잘 이해한다.
정혜신씨는 자기애가 충만한 사회를 만들려면 개별성을 한층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존재는 개성, 개별 취향, 개별 색깔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일란성쌍둥이도 각각 다른 존재다. 정혜신씨는 그 개별성을 외면하는 게 우리 사회의 불행이라고 주장한다. 개별적 인간, 그 사람만의 상황을 알아야 그를 이해하고 고민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주위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만들고 마침내 사회도 건강해진다고 정혜신씨는 강조한다.
■ "쌍용차 노동자·가족들 정신적으로 피폭 상태"
정혜신씨가 올해 들어 주력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심리 상담이다.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은 2009년 회사의 구조조정 방침에 맞서 77일간 파업을 했는데, 파업을 저지하기 위해 경찰특공대가 투입되면서 상황이 종료됐다. 노조원들은 경찰력에 고스란히 노출돼 육체적, 정서적 상처를 받았다. 경찰에 맞고 붙잡힌 모습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들은 인간의 존엄을 부정당했다. 그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공장에 피해를 준 과격시위자라는 시선이었다. 정혜신씨는 "심리적, 정신적으로 방사능에 피폭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15명이 세상을 떠났다. 정혜신씨가 나선 것은 올해 2월 해고노동자 임무창씨가 돌연사했다는 기사를 읽은 뒤였다. 그의 부인이 지난해에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으니 아이들은 이제 부모 없는 고아가 된 것이다. 정혜신씨는 "그 기사를 읽고 정신과 의사로서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정혜신씨가 진단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고통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였다. 인간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을 망가뜨리는 재앙적이고 파국적인 스트레스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지만 이것은 사람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정혜신씨가 상담한, 5공화국의 고문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스트레스 바로 그것이었다.
정혜신씨가 달려갔을 때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대면하지 못했다. 참담한 기억을 떠올리는 게 또 다른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잊으려 애쓰고, 상처로부터 도망치면서 2년을 버텼던 그들이었다. 정혜신씨는 어렵게 해고노동자와 가족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감정에 공감했고 함께 울고 함께 분노했다.
1기 상담프로그램은 그렇게 끝이 났는데 참가 노조원과 가족들은 마음의 상처를 많이 털어냈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꾸려진 2기 프로그램에는 지원자가 훨씬 많았다.
■ 정혜신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했으며 현재 정신과 전문의로 마인드프리즘 대표다. ●어려서부터 아파트에서만 살아 땅을 밟으며 살고 싶었는데 10년 전 경기 양평군 개군면으로 이사하면서 그 꿈을 이루었다. ●남편 이명수씨와 함께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의 마인드프리즘으로 출근하는 길을 그는 맛나고 푸짐한 사유의 성찬을 맛볼 수 있는 시간으로 표현했다.
박광희 국제부장 khpark@hk.co.kr
●사진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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