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초 국세청에 58억원이 들어왔다. 스위스 세무당국이 사상 최초로 배당세액을 정산하여 보낸 돈이다. 다수의 제3국인이 스위스 금융기관 계좌를 통해 한국 증시에 투자한 뒤 받은 배당금에 세금을 매겨 보내 준 것이다.
스위스의 조치는 양국간 조세조약 때문이다. 한ㆍ스위스 조세조약에 따르면 스위스 계좌를 통해 한국에 투자한 뒤 발생한 배당금에 대해 우리나라 세무당국은 원천징수를 하는데 국적에 따라 세율이 다르다. 스위스 국민(거주자)이라면 15%, 제3국인이라면 20%가 세율이다.
58억원은 스위스 당국이 최근 5~6년간 한국에서 보낸 배당금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국적 분류가 잘못된 부분에 대해 5%를 추가 징수해 보낸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스위스인으로 알고 15%만 과세했으나, 실제는 스위스인이 아닌 경우를 골라낸 것이다.
이 돈이 주목 받는 건 베일에 가려졌던 스위스 금융기관에 몰린 국내 자금 규모를 어림잡아 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스위스인이 아닌데도 스위스 계좌로 한국에 투자한 사람이 모두 한국인이라면, 스위스 정부가 보내 준 58억원은 스위스 은행계좌를 통해 한국인이 국내에 우회 투자한 자금의 규모가 5,000억~1조원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와 관련, 국세청 관계자도 "대기업을 포함한 대주주들의 비자금이거나 불법 은닉된 정치자금의 일부일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문제는 자금 출처를 정확하게 밝혀낼 수 있느냐다. 국세청은 역외 탈세 혐의를 받는 '선박왕' 권혁 시도상선 회장과 '구리왕' 차용규씨의 은닉 재산을 찾고 있으며, 스위스에 은닉된 것으로 보이는 자금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규명하겠다는 방침.
일단 지난해 한국과 스위스가 개정에 합의한 조세조약이 그 방법으로 거론된다. 내년쯤 적용될 새로운 조약에 따르면 은밀한 자금으로 의심되는 계좌명세 및 금융거래 내역을 교환할 수 있다.
그러나 개정안이 통과되더라도 과거 내역까지 소급 적용될지는 불투명하다. 현재로서는 2009년 스위스 은행 UBS가 탈세 혐의자 4,450명 명단과 계좌를 미국 정부에 넘겨준 것처럼 스위스 정부나 은행이 비밀계좌에 대한 빗장을 풀어야만 전주(錢主)를 밝힐 수 있는 상황. 그러나 비밀계좌 덕분에 국내총생산(GDP)의 11%를 차지할 정도로 금융산업의 성장을 이뤄낸 스위스 정부가 이를 공개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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