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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23) 부천영화제를 만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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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23) 부천영화제를 만드는 사람들

입력
2011.06.15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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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검푸른 하늘을 장식하는 불꽃과도 같다. 펑펑 터지는 불꽃에 얼굴이 밝아지고 환호성이 터진다. 한국에선 흔하디 흔한 축제라는 비판을 듣곤 하는 영화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불꽃 같은 흥겨움이 작렬하고, 불꽃이 사라진 뒤의 잔상이 추억으로 변환된다. 영화제라는 불꽃놀이를 위한 화약을 준비하고, 불꽃을 쏘아 올리는 사람들의 땀이 있기에 가능한 흥취다.

영화제 준비가 뭐 별거 있냐는 반문도 있겠다. 대중이 좋아할 영화들 모아서 극장에서 상영하면 되지 않냐고. 몇몇 유명 가수들 동원해 눈에 띄는 이벤트 몇 가지로 흥을 돋우면 대충 축제 모양새를 갖추는 것 아니냐고. 예산만 넉넉하면 누구든 좋은 영화제를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적어도 영화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손사래를 칠 우문들이다.

폭풍이 지난 간 뒤의 여유

10일 오후 8시9분께 경기 부천시 상동 한국만화영상진흥원 1층에 위치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사무국. 실내에 들어서자 더운 기운이 훅 끼쳤다. 낮보다 서늘해진 밖의 기온보다 1, 2도는 높은 듯한 실내 온도. 영화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체온이 수은주를 슬쩍 올려놓은 것일까.

60여개 책상 중 자리가 차 있는 것은 고작 10개 남짓. 아무리 늦은 오후라지만 올 영화제의 차림표를 첫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나흘 앞둔 사무국 풍경치곤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제 상영작을 선정하고, 상영 일정 등을 조정하는 박진형 프로그래머는 “뼈와 살이 타는 기간은 어느 정도 지났다”며 짐짓 여유를 부렸다. “지난주에 상영작 대부분을 확정하고 지금은 보도자료 원고를 마감하는 중”이라는 설명도 뒤따랐다. 부천영화제 생활만 5년째인 박 프로그래머의 입을 빌려 “흉한 꼴을 한 채 하루 24시간 체제로 일을 했던 지난주”를 되돌아볼 수 밖에.

“2주일 동안 하루에 잘해야 3,4시간 잤을까요. 스크리너(DVD 형태로 영화제에 출품된 영화)를 (오른손을 30㎝정도 높이로 들어올리며) 이만큼 쌓아 놓고 봤어요. 하루에 16, 17편 정도 봤을 거에요. 처음 30분은 정상적으로 보다 (영화가) 아니다 싶으면 2배속으로 보죠. 그렇게 최근 본 영화만 150편이에요. 영화 보는 것만 일이 아니죠. 영화들이 정말 상영 가능한지, 상영 방식은 필름인지 디지털인지 일일이 전화를 걸어 최종 확인을 했어요. 외국 영화는 제작사뿐 아니라 해외 배급사, 아시아 배급사, 국내 수입사 등의 입장을 다 조율해야 하니 최종 결정까지 기다림의 연속이죠. 영화 상영 확정 이후에는 보도자료와 홈페이지, 상영 일정표를 순차적으로 만들었어요. 그렇게 일하다 지난 월요일 크게 한방 얻어 맞았어요. 개막작 상영을 철석 같이 믿었던 영화가 어그러진 거에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몇 시간 동안 일손을 놓고 멍하니 있었어요. 다행히 차선책으로 준비했던 영화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큰 고비를 넘겨서인지 박 프로그래머는 아찔했던 순간을 무용담처럼 전했다. 그러면서도 “내일 인쇄 들어갈 보도자료 교정을 봐야 해요”라며 업무로 돌아갔다. 영화제의 꽃으로 흔히 일컬어지는 프로그래머. 그러나 “저희 영화 상영해 주세요”라는 요청을 받을 때만 유일하게 갑의 위치에 있는 영화계의 대표적인 을. “불법 파일이 도는 영화들은 상영작 목록에서 솎아 내야 하고 상영 일정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의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폭풍

13일 오후 8시께 다시 방문한 부천영화제 사무국. 박 프로그래머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휴대폰을 얼굴에 밀착하고 사무실을 오락가락했다. ‘뭔 일이냐’며 명수미 홍보팀장에게 물으니 슬쩍 귀띔을 해 줬다. “개막작이 막판에 속을 썩이네요.” 개막작으로 선정된 인도 영화 ‘발리우드 위대한 러브 스토리’ 제작사 쪽의 형식적인 최종 회신이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자회견을 하루 앞두고 있어 부쩍 부산해진 사무국. 드르륵거리는 복사기 소리와 치열한 컴퓨터 자판 소리 속에서 유지선 프로그램팀장이 박 프로그래머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럴 때가 가장 아찔해요.” 별일 아니라면서도 박 프로그래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많이 사라졌다. “마지막 확답을 주기로 한 지 이틀이 지났어요. 이렇게까지 늦게 결정된 경우는 처음이에요. 중간에 워낙 변수가 많으니까요.”

대화를 나누던 중 박 프로그래머의 휴대폰에 불이 들어왔다. 통화를 마친 박 프로그래머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12일은 쉬는 날이고 그곳은 이제 출근 시간이니 이메일 확인을 뒤늦게 했다네요.”

뒤늦은 개막작 확정을 박 프로그래머 탓으로 돌려야 할까. 영화제 상영작 결정 과정의 살인적 업무를 감안하면 누구도 쉬 돌을 던지지 못할 듯.

영화제는 따끈따끈한 신작을 선호하기 마련. 부천영화제는 세계 영화계의 최신작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칸국제영화제를 최고 구매처로 여긴다. 2,000편가량이 소개되는 칸영화제에서 부천영화제는 전체 상영작의 20%정도를 구해 온다. 올해 칸영화제가 5월 22일 폐막했으니 2주일 남짓한 기간에 많은 영화를 섭외하고 상영 여부까지 결정지은 셈이다. 유 팀장은 “아무리 시간이 빠듯해도 칸영화제 상영작을 포기할 순 없어요. 신선하고 좋은 작품을 구하려면 어쩔 수 없죠”고 말했다.

많게는 900유로까지 요구하는 영화 상영료도 상영작 결정의 걸림돌. 유 팀장은 “상영료를 별도로 요구하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어요. 상영료 때문에 경쟁 영화제에 영화를 뺐기는 경우도 간혹 있어요”라고 밝혔다.

완성도 높은 신작을 수월하게 가져올 방법은 결국 인간관계다. 박 프로그래머는 “영업사원과 다를 바 없어요. 영화제 가면 파티란 파티를 쫓아다니며 해외 제작자 등과 안면을 트는 것도 일”이라고 말했다. 올해 부천영화제에 첫발을 들인 이영재 프로그래머는 “일본에 첫 해외 출장 갔을 때 명함 두 통이 금새 동이 나 편의점 칼라복사기로 명함을 복사해 다녀야 했어요”라고 거들었다.

영화제 업무 본격 시작

“어젯밤 2시간 동안 보도자료 오자에 스티커 붙이고 퇴근했습니다.” 박 프로그래머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업무에 집중했던 사무국에서의 모습과 달리 복장은 말쑥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도 채 씻기지 않은 피로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보도자료 인쇄 업무 등으로 50시간 연속 눈을 뜨고 있었다”는 명 팀장의 얼굴에도 짙은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다.

14일 오후 5시께 서울 창천동 한 백화점 부속건물에서 열린 기자회견은 올해 부천영화제의 공식적인 첫 관문이었다. 대기실에서 만난 박 프로그래머는 “상영작을 발표하는, 영화제의 개시를 알리는 행사니 가슴 떨릴 수밖에 없죠”라고 말했다.

4시59분깨 대기실을 떠나 기자회견장으로 향한 김영빈 집행위원장과 박 프로그래머 등은 30분 뒤 상기된 얼굴로 돌아왔다. 박 프로그래머는 “이제 한숨 돌리게 됐어요”라며 활짝 웃었다. 그러면서도 “집에 돌아가면 관객들을 위한 책자 원고 교정을 봐야 하는데…”라며 일 걱정을 했다. 홍보팀의 이서연씨도 “상영작들이 공개됐으니 영화를 알리기 위한 본격적인 일은 이제 시작이에요”라고 말했다. 김 집행위원장은 “책정된 예산으로 상영작 선정하고 영화제를 이렇게 하겠다 발표까지 했으니 영화로 치면 오늘은 크랭크인(촬영 시작)에 해당합니다. 잘 준비해서 개봉에 해당하는 개막 때까지 잘 준비해야죠”라고 했다. 34개국 221편의 영화가 상영될 부천의 여름 축제는 그렇게 일에 대한 열의를 보이며 열다섯 번째 시작을 알렸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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