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16> '황혼의 검객'(1967)과 트램펄린 효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16> '황혼의 검객'(1967)과 트램펄린 효과

입력
2011.06.13 17:38
0 0

'순간은 영원히'(1966)로 쇼브라더스의 란란쇼 사장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고 스카우트 결정이 이뤄졌지만 아직 한국에서 촬영해야 할 진행 중인 영화들이 있었다. 늘 새로운 시도를 해왔고 비교적 성공했던 점, 그렇기 때문에 또다시 새로운 시도를 거침없이 해볼 수 있다는 점 등 긍정적 순환고리를 타고 보니 어느덧 '새롭다'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나의 저력이 되어 있었다.

데뷔 이후 현대물과 청춘물, 사극, 멜로드라마, 액션영화 등을 고루 다 해보니 조금 더 색다른 시도를 해 보고 싶어졌다. 그 때 홍콩 호금전 감독의 '방랑의 결투'를 보고 인상 깊어서, '이런 작품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모방할 수 없으니 우리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모색하다가 시나리오 작가 곽일로씨와 상의를 하게 됐다. "검객물을 한 번 해보고 싶은 데, 얘깃거리를 한번 만들자"하고 의견을 나눈 끝에 장희빈 시대를 배경으로 검객 주인공을 등장 시킨 것이 '황혼의 검객'(1967)이었다.

처음 시도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역시 어려움이 많았다. 무술지도도 스턴트맨도 없으니, 검술 장면을 어떻게 처리 할 지가 고심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내게 힘이 되었지만 막막한 현실은 역시나 암담했다. 연출자로써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야 이제 다반사가 되었지만, 또 다른 시도를 하게 되니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결국 '이 영화는 영상미학을 중심에 두면서, 몽타주 기법으로 처리하자'로 방향을 정했다.

예컨대 20여 개의 말 동상들이 세워져 있는 사이에서 남궁원과 허장강이 결투하게 해 동상들을 미학적으로 처리하고자 했다. 한 폭의 동양화같이 아름다운 우리 고성의 '한국적인 선'을 활용하여 궁의 지붕만 보이는 능선을 설정해 놓고 그 미장센을 통해 압축적이고 효율적으로 주제를 표현하려고도 했다. 그 곳에서의 둘의 결투 장면은 몽타주로 짧게 편집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 넘는 장면의 표현을 위해 국내 처음으로 트램폴린을 사용해 보기도 했다. 그 당시까지 한국에서는 아무도 트램폴린을 사용할 줄 몰랐던 때였으니 대담하고 놀라운 시도였다.

허장강이 위로 뛰어 넘어가면서 팔을 자르는 장면이 트램폴린을 사용한 장면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트램폴린은 내가 특별히 애용하는 도구가 되었다. 와이어 액션은 너무 느려서 박진감이 떨어졌고 트램폴린을 사용하면 힘있고 속도감 넘치는 액션이 연출될 수 있었다. 특히 던져진 사람이 공중으로 날아가서 바닥에 나가떨어지는 역동적인 한 장면 같은 경우 마룻바닥 사이에 파우더를 뿌려놓아 떨어질 때 푹석 먼지가 피어 오르는 멋진 미장센 효과를 만들어 냈다. 빠르고 액티브한 액션과 먼지가 가득 피어 오르는 화면으로 어느 한 곳도 빈틈없이 박진감이 넘쳐나게 하고자 했다.

나름대로 특수효과도 시도했다. 남궁원이 상대 수하를 죽이는 장면에서 한 번에 목이 잘려 날아가는 장면 같은 경우 따로 제작해둔 사람 머리를 머리 위에 다시 뒤집어씌우고 남궁원이 진짜 칼로 한 칼에 벤다. 실전 같은 연습을 여러 번 시행 한 후 다이내믹하게 머리 날라 가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실험적인 시도로 만들어낸 '황혼의 검객'은 '무에서 창조한 유'나 다름없었고, 주어진 여건에 비해 비교적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2004년 7월, 프랑스 파리 시장이 주관하는 파리 시네마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회고전을 한 적이 있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과 '노다지',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 '황혼의 검객' 등 다섯 편이 상영되었다. '황혼의 검객' 이 종영된 후 극장에 입장하니 1,000여 명 되는 관객들이 감독과의 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프랑스 관객이 "칼라 영화로 만들었으면 참 멋있었겠습니다. 그런데 흑백으로 봐도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라고 말하며 미장센에 대해 찬탄했다.

왕비가 입고 나오는 의상 같은 경우의 예를 들며 "이런 것을 칼라로 찍었으면 얼마나 멋있었겠습니까?"하는 식의 아쉬움 섞인 호평이었다. 더불어 한국 역사에 대해서 상당히 심도 있는 질문을 하며 파고들기도 했다. 당시 관객과의 대화는 생각보다 깊이 있고 분석적이어서 프랑스 사람들은 영화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니 질문하는 것도 상당한 식견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프랑스 시민들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황혼의 검객'의 미장센은 만주 대륙물 시대를 열어젖혔던 전작 '지평선'의 첫 장면의 미장센에서 시도했던 미학적 접근방법과 비슷하다. 조미령과 김석훈이 주연을 맡아 연인으로 나왔고, 나라를 찾겠다고 목숨을 耗?사람들의 얘기가 주제였는데 첫 장면에 그 당시 주어진 여건 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특수효과를 시도했다.

석양이 질 무렵 화면 가득 태양이 배경으로 크게 떠 있고 하나의 점과 같이 말 한 필이 실루엣으로 카메라를 향해서 롱 쇼트로 달려온다. 그 뒤로 말 예닐곱 필이 추격을 하면서 말 위의 사람들이 총을 쏜다. 주인공 김석훈의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총탄의 불꽃들…

그 장면을 위해 주인공 김석훈을 스튜디오 안 말 조형물 위에서 달리게 하면서 불빛이 나는 실탄(예광탄)을 사방에서 쐈다. 화면을 보면 총알 날라 다니는 것이 보인다. 말 인형을 탄 김석훈을 화면 중심에 잡아 놓고 뒤에서 예광탄이 이쪽으로 날아오고 저쪽으로 날아가고 하는 것을 교차편집해서 특수효과를 낸 것이다. 김석훈이 탔던 말이 고꾸라지니 말을 방패 삼아 예닐곱 사람을 장총으로 사살하고 그들의 무기를 노획해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지금 같으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는 장면이겠지만, 당시로는 머리를 쥐어짜다시피 궁리를 거듭하여 만든 만족스러운 장면이었다.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1968)은 '황혼의 검객' 성공 이후 세기영화사에서 요청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때 이미 홍콩 쇼브라더스와 전속계약이 맺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 이 작품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완성을 시켜놓고 가자니 배우들의 스케줄이 맞춰지지 않았다. 제작자가 다 맞춰주겠다 약속해서 시작한 작품인데 홍콩 계약 날짜가 임박할 때까지 반 정도 촬영했을 뿐이었다.

쇼브라더스에 연락해서 "이 쪽 사정이 여의치 않아 좀 늦어질 것 같다. 늦어도 연말까지는 간다"했다. 그 때가 1967년 12월이었다. 결국 배우들 스케줄 때문에 마무리가 안 되니 할 수 없이 연출부 서열 1위 김순식 조감독한테 맡겼고, 함께 진행되었던 다른 영화 '광야의 결사대'는 전우열 감독한테 맡겼다. 양쪽 영화사 사장한테 찾아가서 "도저히 내가 완성을 못한다. 난 어떻게든지 완성을 해주고 가고 싶었는데, 또 감독은 그런 책임이 있는데, 잘못하면 국제 소송이 걸리니 어쩔 수 없다. 원래는 석 달이면 끝나야 할 것이 6개월에도 완성을 못했으니 갈 수 밖에 없다"해서 양해를 얻고 홍콩으로 가야 했다.

이런 저런 이유야 있었지만 감독이 자기 작품을 완성 못하고 손을 빌려 맡겨놓고 떠나버렸다는 것은 부끄럽다. 그래서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이나 '광야의 결사대'를 내 작품 목록에 넣는 것은 몹시 꺼려진다. '광야의 결사대'는 지금까지 본 적 조차 없고,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은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때 처음 볼 수 있었지만 내 작품이라 인정하기 어려웠다.

어렵고 영세한 여건 속에서 파란만장한 한국초창기 영화제작 시기를 보냈던 나는 이제 한 시대를 접고, 설렘과 두려움 가득한 미래, 홍콩 쇼브라더스를 향해 출발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