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 도쿄 긴자에서 방사선농도측정기를 임대해주는 회사가 소개됐다. 이 회사는 평소 원자력 관련 업체 임직원들에게 방사선농도측정기를 빌려주고 있는데, 최근 주부들의 대여 건수가 급증했다고 한다. 하루 임대료가 1만엔(13만5,000원)으로 싸지 않은 가격이지만 확보해놓은 측정기 300개가 모두 대여 됐는데도 주부들의 요구는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안전하다는 정부발표 신뢰 못해
방송은 어렵게 측정기를 빌린 도쿄 인근 지바 지역의 주부를 따라 나섰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을 둔 이 주부는 측정기를 들고 유치원 교정을 비롯, 동네 어린이 놀이터, 공원 등을 누비며 직접 방사선 수치를 재기 시작했다. 딸 아이가 방사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보다 안전한 장소를 찾아주고 싶어서였다. 정부와 문부과학성이 현재 발표하고 있는 지바 지역 방사선 농도 측정수치는 시간당 0.05 마이크로시버트(μ㏜) 안팎. 이를 1년치로 환산하면 0.5밀리시버트(mSv)에 해당한다. 통상적으로 어린이 피폭량이 1년간 1mSv 이하면 안전하다고 간주된다.
이 주부는 정부의 발표를 신뢰할 수 없다며 직접 조사에 나섰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십 군데를 조사한 결과 상당수 지점에서 시간당 0.4 마이크로시버트에 육박하는 방사선 양이 측정됐다. 이는 정부가 정한 어린이 피폭 허용량 연간 20mSv에는 못 미치지만, 원자력 전문가들과 시민단체가 주장하는 연간 1mSv를 기준으로 한다면 분명 우려할 수준이다. 수치도 지역에 따라 제 각각으로, 아스팔트에서는 0.3μ㏜가 검출됐는가 하면, 불과 수십㎙ 떨어진 풀밭에서는 0.4μ㏜가 측정됐다. 결국 이 주부는 딸 아이가 밖에서 안전하게 뛰어 놀 곳이 없다고 판단, 방사선 양을 측정하는 일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일본 주부들이 방사선 측정기를 직접 들고 거리로 나선 이유는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표본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가 측정, 발표하고 있는 방사선 수치는 대부분 지상 18㎙에 위치한 측정기를 토대로 하고 있다. 이들 장치는 1960년대 미국, 구 소련, 중국 등이 경쟁적으로 핵실험에 나설 당시 외부로부터 날아오는 방사선 양을 측정하기 위해 설치된 것들이다.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방사능 물질은 기본적으로 다른 공기에 비해 무거워 바닥에 깔리는 것이 보통이다. 최근 조사에서는 지표에서 높이 50㎝이내에서 방사선 80% 이상이 집중돼 있다는 결과도 공개됐다. 작은 키에 평소 흙을 가까이 하는 어린이들이 어른에 비해 방사선에 취약한 것도 이런 연유이다.
옛날 측정방식 변경케 하는 성과
도쿄도청은 지난 주부터 신주쿠구(區) 한 곳에서만 실시하던 방사선 검사 대상 지역을 도내 100여 군데로 늘리고, 조사 지점도 지표 1㎙ 이내 지점으로 낮추기로 했다. 도호쿠(東北)대지진이 발생한 지 석 달이 지난 시점에서 이런 조치가 이뤄진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잘된 일이다. 이는 주부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시민단체가 각 지역의 방사선 수치를 직접 측정, 지자체에 보다 광범위한 조사의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 온 덕분이기도 하다. 도쿄도 뿐 아니라 다른 지자체들도 정부 발표와는 별개로 조사 지역을 확대하겠다고 잇따라 발표하고 있다. 주부들의 미약한 힘이 모여 일궈낸 성과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정부와 도쿄전력은 여전히 원전과 관련된 많은 것들을 숨기기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방사선 물질에 오염된 먹거리가 검출됐음에도, 건강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강변하는 지자체와 업체들도 줄지 않고 있다. 이런 환경이 지속되는 한 주부들이 방사선 측정기를 내려놓을 날은 더욱 요원해질 것 같다.
한창만 도쿄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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